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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Jul 06. 2023

자판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

당신 글은 색깔이 없어. 넌 허당이잖아.

"당신 글은 색깔이 없어."

남편의 신랄한 비판이다. 브런치 제1호 구독자 남편.

가감 없는 비판을 한다. 무섭다.

내 인생을 돌아보며 색깔 시리즈로 글을 쓰겠다고 덤벼들었는데 '내 인생의 색깔'이란 글을 보더니 대체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

잠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화도 난다. 수시로 먹으라고 주신 약을 먹어야 되나?

죽일 놈의 남편이란 드라마가 있었나? 문득 그 단어가 스치고 간다. 아니 이 죽일 놈의 사랑이란 드라마였나?

머릿속이 하얘서 생각도 안 난다.

"그래, 내 곳간에 쌓인 게 아무것도 없어서 이 정도 글밖에 못 쓴다고."

그냥 자판 두드리는 게 즐거웠다. 학기말이라 열심히 써대고 있는 수행평가 작문 말고 브런치에 글 쓰는 거.

재미있고 즐거웠다. 산행처럼 잡념을 없애버리는 브런치 글쓰기.

남편의 신랄한 비판 앞에 허물어진다.

자판이 무겁게 느껴진다. 글은 너무 쓰고 싶은데 열심히 썼다가 부끄러워졌다가 반복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쓰고 싶다는 열망 앞에서 남편의 비판도 글에 대한 부끄러움도 다 사라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정말 복 받은 일이다. 아버지의 반대 앞에 영어선생님은 못 되고 초등교사가 되었지만 어쨌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고, 브런치 작가도 되어서 글도 쓰고 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우울도 조금씩 사라지고, 우울이 사라지니 아들을 바라보는 데 참을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내 기준에서는 하등 쓸모 없는 게임이지만, 그 게임이 너는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글쓰기와 게임과몰입을 감히 비교할 순 없다. 분명히 치료받아야 될 중독현상이다. 그렇지만 뭔가를 좋아서 한다는 건 공통점이라 아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게임 과몰입을 일순간에 고칠 순 없다. 여러 가지 방법을 계속 실행해야 되고,  끊임 없이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고성이 난무하는 생활이라도 그만둬야 했다.

게임은 아들과 나 사이에 여전히 넘어야 될 벽이지만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특히 안아주기 시리즈를 쓰면서 아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글쓰기가 준 마음의 여유였다.



여기서 반전.


신랄한 비판을 하던 남편이 나한테 신랄한 비판을 당하고 있다.

호주에 한 달 출장을 갔다. 어제오늘 호주발 우편물이 4장이 왔길래 이게 뭐지 했다.

오랜만에 같이 산책을 가려고 나서는데 우편함에 또 2장이 더 있다. 뜯어보는 남편.


벌금고지서.


호주달러로 370불, 231불, 현란한 숫자들이다.

한 달 출장비로 구찌 가방 사준다더니 웬걸 벌금으로 다 나가게 생겼다.

그래 내 인생에 구찌 2호가 웬 말이냐.


그런 당신이 내 글을 비판했다고? 맛 좀 봐라. 정말.

아.... 정말 자판이 무겁게 느껴진다. 남편의 비판도, 남편의 벌금도, 띠링 띠링 울리는 벌금 결제 문자도.

삼성카드사에서 이 늦은 밤에 분실이라도 당했을까 봐 친절히 전화도 온다.

"혹시 해외에서 렌트하시거나 한 일이 있으신지~~."

머리가 아프다.

아마 내일 우편함에서 몇 장 더 발견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구찌는 멀어지고, 브런치로  지출되지 않은 쇼핑금액 당신이 한 방에 다 써주시는구나.

우리 아들 삼 년 치 용돈이며, 부인 옷 다섯 벌도 더 살 돈이란다. 이 색깔 뚜렷한 남편 같으니라고.

내 인생에 또 소나기가 내리는구나.

얼른 개이길 바랄 뿐. 저렇게 허당인 남편과 언제까지 살아야 되는지 슬슬 짜증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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