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용 식탁은 식사를 위한 것인가? 넓은 책상은 공부를 위한 것인가? 집 장식을 위한 인테리어인가?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적어도 3가지 이상 반찬을 차려 내고 따뜻한 국이나 찌개를 올리던 엄마 아침 밥상이 생각난다. 경제 상황은 그 시절의 엄마보다 훨씬 좋은데, 인덕션을 비롯해 가재도구는 더 갖추고 사는데, 식탁은 6인용인데, 정작 핵심인 밥상은 늘 초라하다. 6인용 식탁이 아니라 개다리소반이면 충분히 놓고도 남을 수준의 밥상을 차리면서 필요한 것들은 다 갖추고 사는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이사를 오면서 6인용 식탁을 살 때는 밥도 먹지만 한쪽에서 책도 읽을 요량으로 구입을 했다. 식탁은 식탁일 뿐이다. 식탁이 서재가 되는 순간 본질은 흐려지고 식탁 위는 지저분해지며,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식탁은 어지러운 상태로 의미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온갖 문제집과 책들이 꽂혀 있는 널찍한 책상도 있다. 어릴 때부터 탁 트인 넓은 공간에서 공부하는 걸 좋아했던 관계로 아이들에게도 비싼 값을 지불하고 널찍하고 좋은 책상을 구매해 줬다. 하지만 우리 집 책상은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책상 위에는 과자 봉지와 휴지, 옷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나마 책이 널브러져 있다면 책상의 본질과 목적에 충실하다고 자조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본연의 목적보다 과시나 자기만족 같은 곁다리가 중요해진 세상. 내가 만든 세상이다.
6인용 식탁은 맛있는 음식을 가족의 건강을 위해 먹이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부실한 반찬으로 인해 개다리소반만도 못한 현실이 되었고 각종 청구서와 우편물 책, 약봉투 등으로 어질러진 공간이 되어버렸다. 넓은 책상과 책장은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으로 구입하고 책들을 잔뜩 쌓아뒀지만 어느 순간 장식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현실에 한숨이 나서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게 된다. 요리에 대한 무관심에 어떻게 해야 되나 늘 고민이다. 자식의 공부 습관을 못 잡아준 것도 후회된다. 어쩔 수 없이 살짝 핑계대 본다. 24살부터 직장 생활하기에 바빴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공부 습관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아이가 따라주지 않았노라고.
아마 우리 아이들도 변명거리를 찾자면 나와 같을 것이다. 요리에 흥미가 가지 않는다고 등한시하고, 자식 양육보다 직장에서 성취를 더 중요시 여기며 살았던 나였으니 삶의 순간순간 중요한 목적을 놓치고 살아왔다. 아이들도 자신들의 성장과정마다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놓치고 살면서, 공부에 흥미도 안 가고 게임이나 놀거리가 많으니 놀기 바빠서 공부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이 저런 말을 늘어놓는다면 인생의 결정적 순간마다 중요한 목적과 할 일을 놓치고 산 엄마는 할 말이 없다.
물건도 목적에 부합하게 쓰여야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순간순간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야 된다. 아이가 어릴 땐 양육에만 신경 썼어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휴직도 하지 않고 아이를 양육했지만 결국 승진도 못하고 아이도 제대로 못 키운 엄마가 되었다. 아이 어릴 적엔 일을 마음에서 딱 내려놓고 아이 양육에만 집중했더라면 아이는 안정적으로 컸을 것이고 그렇게 안정적으로 커 온 아이가 단단하고 심지 곧은 아이로 자라 자기 일상에 충실할 때 엄마에겐 일에 더 매진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것이다.
식탁이 식탁과 서재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이도 저도 아닌 공간이 되어버릴 확률이 많은 것처럼, 양육과 일을 동시에 잡겠다는 건 욕심이다. 아이 키울 땐 아이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