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성장 속도와 개성을 진정으로 인정해 주고 있었던가?
큰아들은 엄마가 브런치에서 글을 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엄마가 뜬금없이 왜 안아주기를 시작했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자식이 열심히 공부해 주고 보통의 삶의 경로를 따라주는 부모들은 모를 것이다. 자식이 좋은 대학을 가 주기를 희망하고 좀 더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그런 건 바랄 수 없다. 그저 학교에 가주면 고마운 상태였다. 중학교 3년을 위태위태하게 보내고 고등학교 입학을 시킨 것만으로도 정말 큰 산의 봉우리를 넘은 것이었다. 그런데 또 같은 산을 넘을 줄은 몰랐다.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본인도 약속했건만 갑자기 등교 거부를 하는 아들을 아무 대책 없이 바라봐야 했다. 툭 치면 터져버릴 것 같은 화와 눈물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 아닌 척 멋진 여자인척 예쁜 옷이나 입고 화장이나 곱게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엄마 마음도 아들은 아마 잘 몰랐을 것이다.
한 두 번 반복된 등교 거부가 아니었기에 끊임없는 잔소리와 호통 충고가 먹힐 리가 없다는 걸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등교조차 거부하는 아이를 상담에 데리고 갈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나마 약이라도 먹으니 다행이었다. 시간을 참고 견디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학교에선 별일 없는 척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겉과 달리 타들어가는 마음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심장을 붙들어 매고 있기 힘들던 찰나 브런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글을 쓴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안아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던 30대 남선생님에게 구체적 이야기는 못하지만 아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건네는 충고가 안아줘 보세요, 스킨십을 많이 해보세요였다. 그때마다 대답은 '안아주지 물론'이었다. 그땐 내가 아들을 안아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가뭄에 콩 나듯이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항상 시간은 그 흘러감의 속도를 못 느낄 정도로 지나가 버리니 그 시간들 속에서 아마 2,3달에 한 번 안아주던 것도 스킨십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뭔가 결핍이 있어 보이던 그 남선생님의 충고는, 아마 본인의 경험이나 결핍에서 필요하다고 느꼈을 아주 귀중한 충고였건만, 내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아서 내지는 내가 스킨십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쓱 흘려듣고 말았던 것이다. 아기 때야 하셨겠지만 그건 내 기억에 없으니 기억 이후엔 스킨십 같은 건 하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아들에게 충분히 스킨십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큰아들은 엄마와의 스킨십을 유독 좋아하던 아이였다. 대부분의 남자아이가 그렇다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앉아 있는 엄마에게 몸을 날리듯 던지며 안기고, 여행을 가면 내 팔을 죽죽 잡아끌며 놓지를 않곤 했다. 그 시절엔 그것이 아들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모르는 무지한 엄마였다. 그저 끈적이는 팔을 붙들고 늘어지니 아프고 귀찮기만 했고, 왜 아빠한테는 하지 않는 걸 엄마한테만 하냐는 생각에 남편까지 미워서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으니까 말이다.
아들은 엄마의 관심을 애정을 느끼고 싶어 했던 것을 왜 우리 집 아이들은 나만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언니에게 불평을 늘어놓곤 했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다른 방식으로 저마다의 속도로 자라건만, 개성화 교육, 개별화 교육, 저마다의 개성 존중 등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내가 정작 살아 움직이는 아이의 개성은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저 내가 불편하면 아이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은연중에 흡수하면서 아들은 자랐을 것이다.
자식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나와 다른 존재인 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고, 나와 다른 행동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쟤는 왜 저럴까? 나는 안 그랬는데. 쟤는 왜 저렇게 말하지? 나는 안 그랬는데. 쟤는 왜 책도 안 읽고 공부도 안 하지?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기준을 나를 중심으로 하고 살았으니 자식을 이해하는 것이 쉬울 턱이 없다. 그러니 세상에서 온통 나만 힘든 것 같고 나만 못난 부모 같고 나만 자식을 이상하게 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철학과 주관이 뚜렷해야 되는 것은 맞지만 철학이라는 것이 사람을 바라보는 편협한 기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양육에 있어서 내 기준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제는 충분히 안다.
자식을 키우는데 기준이 뭐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준이란 건 뭔가 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수많은 경쟁을 뚫고 온전히 사람으로 태어난 자식에게 부여할 것은 아니다. 그저 온전히 이해하고 온전한 개별 존재로 아들을 받아들여야 된다. 그저 내 자식으로 태어난 준 것에 감사하며 건강히 자라고 있음에 기뻐하며 본인만의 속도로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며 자란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아들의 행동에 '그러려니' 한다. 예전에 '그러려니'가 아휴 네가 그렇지라는 원망 섞인 포기의 의미였다면 지금의 '그러려니'는 다르다. 너는 나랑 다른 존재이고 너만의 개성을 가진 나와 다른 사람이니 그럴 수 있겠거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라는 의미이다.
조금만 더 일찍 엄마의 기준을 던지고 온전히 아들을 이해하려고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들이 말한다.
"그놈의 브런치, 브런치, 에휴"
드디어 엄마가 브런치를 하는 걸, 글을 쓰고 있는 걸 알고 아는 척을 한다.
아들의 기준에서 엄마의 글쓰기가 하등 필요 없는 일로 보이나 보다. '그러려니' 한다. 이 또한 아들의 관심이고, 이런 말을 건네는 것조차 엄마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며, 엄마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라는 걸 온전히 알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라면
'어휴, 짜식. 지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게임이나 하는 주제에'라고 말을 하고 있을지도.
글 쓰다가 김치찌개를 졸여버렸습니다. ㅠ
글쓰기 중독에서 좀 벗어나야 될텐데요. 아들 기준에선 엄마도 중독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