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향기 Dec 12. 2023

그냥 일상을 사는 거지.

감기가 심하게 왔다. 목요일부터 목이 따갑기 시작하더니 금요일은 콧물 가래를 동반하며 숨을 쉬기도 힘들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에 병도 아닌 감기 하나에 골골거리기 시작한다. 20, 30대는 목티나 머플러 없이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해도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겨울을 지났는데, 지금은 따뜻하게 입고 티 하나 입어도 춥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자가용을 타고 차가운 바람 한 번 맞지 않고 출퇴근을 해도 감기는 여지없이 찾아온다. 나이가 드니 체력을 보강하는 노력으로 운동이나 양질의 음식 먹기가 동반되지 않는 한 건강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한다.

목요일 상담 후 아들은 마음으로나마 정신을 조금 차린 듯해서 인생의 빛을 보는 듯했다. 일단 아들이 마음이라도 편안해지면 내 마음도 좀 편안해지니 2023년 12월만이라도 좀 편안하게 보내려나 하는 기대를 했다.

여지없이 기대는 무너진다.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 앞에서 일희일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면서도, 기쁜 일도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고 슬픈 일도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마음잡기는 되지 않는다.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사는 게 뭐 이런가 생각도 들었다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가, 아들과 내 인생은 분명 별개이건만 아들 인생을 살아줄 것 같이 덤비는 내 모습이 보기 싫었다가, 그렇다고 미성년 자식에게 부모 노릇을 안 할 수도 없는데라는 생각의 끈을 잡았다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너니 그냥 내버려 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가, 아직도 뭘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한마디로 부모로서 철학이 없구나 느낀다. 늘 이 사람 저 사람의 생각에 휩쓸리고 나만의 확고한 생각이나 의지가 없다는 느낌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도 놓기 싫고 저것도 놓기 싫은 욕심쟁이의 마음이다. 내가 한 선택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때 역풍을 맞기도 싫고,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육아에 최선을 다하고 싶지도 않고, 남들이 봤을 때 엄마 노릇 하나도 안 하고 있다는 욕도 먹기 싫고, 어지간히도 적당히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데 눈은 뜨기 싫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의지로 몸을 일으킨다. 

문득 12월을 마무리하고 1월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사 둔 다이어리가 생각나서 찾기 시작했다. 도무지 나오지 않던 다이어리를 식탁 위에서 발견했다. 이렇게 아무 데나 던져두려고 산 건 아닌데.

이 다이어리를 또 텅텅 빈 채로 한 해를 마무리할지도 모르겠네라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2월 1일 자 지면에 

'당신의 삶이 하루 남았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이 있다.

바로 나온 생각은

'살고 싶다'이다.

하루 남았는데 살고 싶단다. 피식 쓴웃음이 난다. 비록 감기로 골골거리지만 앞으로 몇 십 년은 거뜬히 살 것 같은 상황에서는 딴생각을 하고 있고, 하루 남았는데 무엇을 하고 싶나요라는 질문에는 살고 싶다고 말한다.

언제까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갈망할 것인가?

내 손에 쥔 것들마저 날 떠나게 할 것인가?

주어진 수많은 일상들 앞에서 언제까지 주어지지 않은 것만 찾아 헤맬 것인가?

하루를 남기고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은 살만하다는 뜻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오늘도 씻고 출근 준비를 한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교실 바닥을 뒹구는 아이들 앞에서 조금은 성가신 기분도 들지만 선생님 사랑해요 하는 모습에 또 사르르 마음엔 해가 비치고, 자기 안위만 걱정하는 폭 좁은 관리자의 모습에서 왜 이 학교에 다시 온 거지 한탄을 하다가도 돈은 벌어야 되니 그냥 생각을 접고 출근하고, 저녁은 뭘 먹나 고민을 하며 퇴근을 하고, 퇴근 후 체중계 눈금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잠이 오니 커피를 마시고, 배고프니 밥을 먹고, 오늘도 소파에서 잠들고 새벽까지 불을 켜두는 남편한테 잔소리를 하고, 복잡한 마음에 위안을 얻고자 책을 읽으며 감탄을 하고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하는 희망도 품어보고, 그냥 그런 모습으로 일상은 또 흘러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인생에 대한 큰 기대 없이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벅차고 바쁜 일상을 살면 되는 거다. 삶을 하루 남겨 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지나간 일이, 다가올 작은 일이 일상을 흔들지 않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