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자의 일본 여행은 아빠와 아들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아빠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 배척하던 아들은 아빠의 주도하에 여행을 하면서 아빠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에 대한 마음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아들 때문에 아빠는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힘들다면 힘든 여행의 일정 속에서 아들은 아빠에 대한 믿음을 키웠나 보다. 여행 후 아빠를 대하는 태도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작디작은 변화가 반가웠던 남편은 이번에는 가족 모두의 여행을 계획했고 1월 새해 첫날 홍콩으로 여행을 떠났다.
남편은 길을 찾고 일정을 수행하느라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최대한 남편이 힘들지 않도록 아들은 내가 전담했다. 상담 선생님들마다 아들은 엄마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그 말이 내 마음에는 와닿지가 않을 때가 많았다. 엄마를 사랑한다면서 하지 않아야 될 행동들을 왜 반복하는지, 엄마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들을 여과 없이 내뱉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태들을 겪고 나를 돌아보면 사랑하는 만큼 엄마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고 엄마가 따뜻하길 바라는 아들의 욕심이 오히려 반대의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홍콩 여행 내내 아들은 내 손을 잡고 다녔고 가끔은 엄마 목에 손을 감기도 하고 엄마 껌딱지로 지냈다. 학교도 안 가고 마음이 편안하니 말이 짧은 아이가 이런저런 생각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행 후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도 읽었다. 아들 스스로 엄마 도서관 갈까? 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런 아들의 작디작은 변화에 엄마가 정신을 차리고 발맞추어야 되는데 늘 핑계를 댄다. 에너지가 부족해, 하기 싫어, 언제까지 너의 스케줄을 내 스케줄에 끼워 넣고 너를 우선시해야 되는 거니라는 생각으로.
상담선생님 말씀대로 아들은 나를 너무 사랑하는데 내 사랑이 아들의 사랑에 못 미치는 건지도 모른다.
새해 여행 후 미묘한 변화를 보이는 아들에게 감사하고 내 정신을 맑게 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다.
7년 선배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식이 독립 못하면 끼고 살면 되지, 꼭 독립을 해야 되나?"
난 그 말에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살았다. 성인이 되었으면 독립을 해야지 어떻게 끼고 살 수 있냐고, 자식을 온전히 키운다는 것은 최종적인 독립이 목표가 아니냐고.
나의 절대적 믿음이 아들을 바라볼 때 불편함을 만들고, 조바심을 일으키고, 일어나지도 않은 산더미 같은 걱정들을 만들었다.
끼고 살라는 선생님 말씀이 부모로서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닐 터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아들에게 길을 주는 조력자가 되대, 내 노력이 가닿지 않는다면 최종적으로 끼고 산다고 뭐가 잘못되었냐는 말씀일 것이다.
눈곱만큼의 변화를 위해 수도 없는 노력에 지치는 것보다는 아들의 독립에 욕심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부모로서 할 일을 수행하는 것이 맞다고 어렴풋이 받아들이게 된다.
독립한다면 이보다 기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독립하지 못하면 데리고 살면 된다. 내가 낳은 자식이고 내가 키운 자식이고 키우는 과정에 과오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내가 책임져야 되는 자식이니까. 법륜스님이 늘 말씀하시는 인연과보다. 내가 만든 원인들이 가져온 결과는 내가 받아들여야 된다.
아들의 독립에 욕심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부모로서 내버려 둔다는 말은 아니다. 부모로서 조력자는 되지만 조력하는 과정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예민해지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내 뜻대로 해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아들의 독립에 욕심내지 않기로. 지금 미묘한 변화를 보이는 아들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기로.
부모로서 나의 과오를 분석하고 따지지 않기로. 분석에 그치면서 대책은 없는 분석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아들을 처음 낳은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신혼살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