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현재 지도하고 있는 학부 연구생들은 몇몇이 팀을 이뤄서 지는 6월부터 각자의 주제로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제법 그럴듯한 결과를 얻은 팀도 있고, 여전히 헤매고 있는 팀도 있다. 그중 3명은 플라즈모닉스 신소재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데, 대략 3개월 정도 시뮬레이션과 계산 관련 툴을 익히고 나름의 성과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 팀은 자신들이 계산한 결과가 실제로 구현되는지 실험해보기를 원했고, 다행히 과내에 이런 실험을 해 볼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교수님께서 흔쾌히 공동연구를 수락해 주셔서 이 팀은 9월부터 열심히 실험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이 팀과 최근 미팅했을 때 여러 조언을 해 줬는데,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실험 연구는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논문에 보고된 recipe를 따라 해도, 선배가 써놓은 연구노트를 따라 해도, 심지어 옆에서 사수가 일일이 한 단계 한 단계 알려 주고 지도해 줘도, 결과물은 기대했던 방향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간혹 한 번 실험에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도 있겠지만, 과학에서는 그러한 경우는 쉽게 보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험의 기본은 reproducibility 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줬다.
"실험 연구는 실패의 연속이고, 아마 10번 혹은 20번 중 한 번 정도 결과가 잘 나오면 다행일 거예요. 물론 실험에 익숙해지고 실수가 줄어들면 그 확률은 더 높아질 겁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된 실험 실패로부터 경험치를 충분히 쌓아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물질을 실리콘 웨이퍼 위에 코팅하는 과정이 포함된 실험을 생각해 봅시다. 우선 웨이퍼 표면을 어떤 용액으로 얼마나 오래 세척해야 할지부터가 관건이죠. 그리고 세척한 웨이퍼 위에 코팅하고자 하는 용액을 얼마나 빠른 rpm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스핀 코팅할 것인지도 관건이죠. 코팅된 박막을 오븐에서 압력을 얼마로 뽑으면서 건조할 것인지, 건조된 박막 위에 금속 나노구조체를 어떻게 올릴 것인지, 올리고 난 후 평탄화나 solding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어떤 샘플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회사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아주 정밀하게 표준화시켜 두었고, 웬만한 과정을 자동화시켰기 때문에 이른바 공정의 수율 관리가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학교나 연구소에서의 실험은 각각의 공정에 늘 불확실성이 있게 마련이고, 이 불확실성이 곱해지면 최종 결과물이 원래 원했던 것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확실성은 반복된 실험과 결과물로부터의 피드백을 통해 줄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실험으로부터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죠. 실험의 실패는 누구나 연구생 초반에 겪는 일이지만, 얼마나 빨리 제 궤도로 올라오느냐는 그 연구자가 그 실험 실패의 데이터를 얼마나 잘 들여다보았고 참고했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과정에서는 학부 때 학점이 얼마였는지, IQ가 얼마나 높은지, 시험을 얼마나 잘 보는지 등은 별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더 중요한 요소는 끈기와 집중력입니다. 제가 아무리 이런 이야기 해 줘도 지금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고 직접 데이터를 뽑아 보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준 것처럼, 대부분의 연구개발 과정에서는 실패가 반복되며 좋은 데이터 얻기는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실패는 좋은 레퍼런스가 되며 예기치 못한 발견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석사 과정 시절, 반도체 패터닝 관련 아주 지엽적인 주제의 연구를 했었는데, 실험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던 사람이었는지라, 아무리 실험을 해도 원래 내가 구현하려던 패턴은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었는데, 오히려 그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 부분을 조금 가다듬어 겨우겨우 무사히 데이터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 박사과정 선배님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기에 한 1-2년 걸렸어야 할 시행착오가 한 학기 정도로 줄어드는 혜택도 입었다. 그런데 그간의 실패 경험이 없었다면 새로운 현상을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시야가 트이지 않았을 것이고, 실패 경험에서 찾은 조건을 제대로 기록하고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새로운 현상은 재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패는 비록 세상의 빛을 보기 어렵지만, 세상의 빛을 보는 데이터의 비료가 되며,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비록 고통스러울 수 있더라도, 실패의 경험과 데이터는 꼼꼼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필요하며, 이는 비단 본인의 차후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후배들, 후학들에게도 좋은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최근 존경하는 박모 팀장님께서 본인이 대기업에 재직하던 시절 벌렸던 각종 사업의 실패담을 SNS에 담담하게 공유해 주신 시리즈를 읽었다. 대기업에서도 정말 예상치 못 한 상황이나 변수, 인적 불확실성이나 시스템의 flaw로 인해 원래 추진하려 했던 사업이 뒤틀리거나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무척 많다. 임원들은 프로젝트 하나하나가 본인의 실적과 직결되는 문제이니 실패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는 대부분 추진하려 하지 않거나, 실패했을 경우의 희생양을 미리 설정해 두는데, 그 과정에서 실패로부터 온전히 얻어야 하는 소중한 데이터는 상실되기 십상이다. 실패를 본인의 무능력으로 갈음하는 문화가 남아 있는 조직에서는 되도록 실패로 이른 과정 하나하나의 책임에서부터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실패의 요인을 명시하지 않으려 하며, 이는 후에 비슷한 프로젝트가 론칭되었을 때 유사한 시행착오를 겪게 만드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실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다들 일성을 외치지만, 자신의 실패 경험담, 실패의 요인을 드라이하게 오픈하여 보여 줄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구호는 그저 보여주기 식 구호로 그칠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담담하게 본인의 프로젝트 실패담을 공유해 주신 박 팀장님 같은 분은 그 자체로 감사하고 대단하신 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구중심대학인 KAIST는 올해 이광형 총장님이 부임하신 이후 여러 개혁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실패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이다. 워낙 특이하신 분이라 이런 조직을 신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 편으로는, KAIST 같은 조직에서 이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도 아닌 KAIST 정도 되는 연구중심대학에서 이러한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겠다는 의지 자체는 좋은 시그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정부 발주 연구과제 대부분은 최종 평가 단계에서 '성공'이라는 판정을 자의로 타의로 받는다. 확률적으로도 사실 대부분의 실험이 실패를 거듭하고, 그러한 실험을 모으고 모아야 쓸만한 데이터가 나오는 것인데, 천편일률적으로 거의 모든 과제가 성공을 외치고 있는 상황은 사실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이긴 하다. 이는 둘 중 하나다. 애초에 그 과제는 하나마나한 과제였다는 것 (즉, 누가 해도 성공할 수밖에 없는 low-hanging project), 따라서 그 과제에서 딱히 문제가 해결되거나 혁신적인 솔루션이 도출되기는 어렵다는 것. 혹은 그 과제는 실패했으나 억지로 성공으로 포장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그 연구과제에서 뭔가 쓸모 있는 것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후학들이 관련 연구를 하고자 할 경우, 참고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의당 '실패'연구소라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는 과거의 실패 사례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불확실성과 구조적인 문제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정리하여 활용성 높은 DB로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실패 가능성이 높은 연구 주제를 미리 발굴하는 것, 그래서 비록 실패의 위험이 높더라도, 모험적인 연구를 통해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 보는 시드를 확보해 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미션이 충분히 시행될 수 있다면, 이러한 조직은 장기적으로는 조직 전체에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연구나 사업에서의 실패는 겉으로는 조직에 상처가 되고 쓴 물이 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을 소중한 자산으로 만드는 것 역시 그 조직이 해야 할 일이다. 오지를 탐험할 때도 앞서 길을 개척한 탐험대의 지도에만 의존하면 그 탐험대를 답습하는 정도에서 탐험이 끝나겠지만, 그 탐험대가 남긴 실패한 루트, 실패한 일정, 실패한 시스템적 요인 등을 잘 활용하면 후속 탐험대는 이제는 새로운 루트를 개발하여 새로운 탐험에 성공할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게 된다. 설사 그 새로운 탐험대가 또 실패하더라도, 이제는 더 많은 데이터가 쌓이므로, 그 이후의 탐험대, 더더 이후의 탐험대가 성공할 확률은 높아질 수 있다. 관건은 앞선 탐험대가 기꺼이 그들의 실패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는지 여부일 것이다.
연구자들이 그간 연구한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하여 저널에 보낼 때 실패한 경험은 잘 쓰지 않는다. 논문에 쓸 거리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라도 굳이 실패와 관련된 내용은 잘 언급하지 않는다. 별로 인용되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에서 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연구자들이 서로가 경쟁하는 상대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신뢰가 구축된다면 서로의 실패담을 담담하게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실패담 공유 저널도 각 분야에서 몇 개 정도는 나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논문이 인용될 때 뭔가를 잘했다, 혁신했다, 훌륭하다는 뉘앙스의 positive data 인용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하니까 잘 안 되었더라, 저렇게 하면 실패하더라, 그 이론은 알고 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더라 같은 negative data가 인용도 비슷한 중요도로 크레딧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연구자가 자신의 실패담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패는 좁게 보면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쓴 경험이 될 수 있지만, 조금 더 넓혀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사람과 조직의 시간과 자원을 절약해줄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산이 과연 지금의 세계에서 잘 정착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어쨌든 KAIST가 시도하고 있는 이 방향은 응원하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시도라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담백하게 실패담을 공유하되 그것을 서로 존중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