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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Jan 07. 2019

06. 멀티플레이어, 그 이름은 아빠

    

 “ 조용히 해!"


 가랑비가 부슬대는 오후, 피셔맨스 워프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학교로 올라가는데 큰 소리의 한국말이 들린다.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뒤를 돌아봤다. 여행 온 듯 보이는 아빠가 우리 아들 또래의 막내 아이에게 야단을 치고 있었다.

        

내심 모른 척 갈 길을 가려는데 자꾸 뒤의 상황이 궁금해진다. 걸음을 줄이고 귀를 기울였다. 사연인즉슨, 어렵게 캘리포니아까지 여행 왔는데, 녀석이 비도 오고 걷기도 힘든 데다 자기 관심거리도 없어 계속 투덜댔나 보다. 아빠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오신 모양.

        

카페에 잠시 들렀는데 자꾸 창밖 너머 길거리에 서있는 그 가족에게 시선이 간다. 아빠는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고, 엄마는 아빠 눈치만 힐끔거리고, 아이는 아이대로 풀 죽어 땅만 쳐다보고. 대학생쯤 돼 보이는 두 형들은 먼발치에 떨어져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쯤 되면 저 가족의 컨디션은 게임오버. 많이들 설렌 여행이었을 텐데.

        

결국 그놈의 오지랖이 발동, 가족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순간 아이들이 모여들더니, "와! 한국 사람이다!” "... "저기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예술대학이 하나 있는데, 옥상 전망이 괜찮거든요. 구경 가실래요?” 하지만 구세주를 만난 듯한 표정의 엄마와 달리 아빠는 시큰둥했다. “비도 오는데 뭐 보이겠나요..”

        

알카트라즈 섬, 베이브리지 등 샌프란시스코 명소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꼬드겼다. 혹시라도 삐끼로 오해할까 스스로 찔려, '공짜'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덧붙였다. 그 말에 더 삐끼 같아 보였는지 아빠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 나이에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 내가 저 학교 학생이라고, 최대한 참신해 보이는 표정으로 다시 권유했다. 결국 아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족들을 향해 말한다. "그럼 잠깐.. 들렀다 가볼까..”

        

함께 학교로 걸어 올라가는 길, 나는 막내아들을 쓰다듬으며 일부러 힘줘 말했다. “야.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나중에 크면 이런 여행 준비해 준 부모님한테 엄청 고마워할 거야 하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빠가 속을 털어내기 시작한다. 어렵게 연월차 모아 여기까지 왔는데, 애들에게 미국의 자연과 역사를 보여주려 몇 년을 계획했는데, 남들은 부럽다고 난리인데 이 녀석들이 아주 배가 불러서,, 등등.

        

에고 내가 그 속을 왜 모르겠습니까, 나도 가족들과 여행깨나 다닌 사람인데. 사실 우리 집도 여행 준비는 거의 나 혼자 하는 편이라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가족, 특히 어린 아들 녀석이 알아주기는커녕 불평불만 늘어놓으면 속이 엄청 상한다. 특히 녀석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노라 계획했는데, 가기 싫다 여기 왜 왔냐 재미없다 투덜거리면 속으로 다짐한 게 수백 번이다. ‘내 다시는 오나 봐라..’

        

사실 가족여행이라는 게 블로그나 페북 올라오는 것처럼 마냥 우아하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지고 볶으며 다니기 일쑤다. 게다가 아직 개념 없는 초딩까지 딸려 있으면 고난의 행군 수준인 경우가 많다. 안 싸우고 오는 게 다행이지.

        

학교에 들어서자 한국 학생 몇이 내게 인사를 한다. 내심 반가웠다. 이제 내가 삐끼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옥상에 올라가 연무에 뒤덮인 베이 풍경을 보여줬다. 사진 전공한답시고 최대한 프로페셔널한 포즈로 가족사진도 찍어줬다. 디에고 리베라 갤러리에서는 오리지널 벽화 앞에서 프리다칼로 얘기도 해주고 다른 교내 전시도 구경시켜 줬다.

        

학교가 코딱지만 해서 다 둘러보는데 한 시간도 채 안 걸렸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히 엄마가 아주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교문 앞에서 헤어지려는데 아빠가 밝은 표정으로 명함을 건넨다. 고맙다고. 한국 들어오면 꼭 연락 달라며.

        

아까와는 반전된 분위기로 가족은 왁자지껄 골목을 내려간다. 전봇대에 기대어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쳐다봤다. 우리 가족 여행 다니던 생각이 난다. 얼마 전 여행 왔던 후배 가족 생각도 나고. 그러다 한국 생각, 친구 생각 등등..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 수업도 없는 날, 하루 종일 암실에 처박혀있어 왠지 센치했는데 저 가족 덕분에 잠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행자들은 서툴다. 여행이란 것이 본래 익숙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투박한 나를, 마뜩잖은 상대방을, 그리고 낯설게 느껴지는 서로의 거리를 여행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그 모두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달달하니 되새김질된다. 그만큼 우리 안의 공간이 조금 더 넉넉해졌음을, 그 크기만큼 우리가 성장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저 아빠의 서투름을 난 이해 한다. 멀티 플레이어 역할하느라 자신의 즐거움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것도 잘 안다. 오늘의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머리는 온통 여행 일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제 막 미국에 도착한 저 가족은 내일 다시 라스베가스까지, 거의 열 시간을 아빠 혼자 운전해서 간단다. 하지만 뒷자리에서 조잘대는 가족들을 보며 그는 곧 피곤을 잊을 것이다. 오늘의 모진 다짐도 잊어버릴 것이다. 마음속에서는 벌써 다음 여행을 상상하며.

        

여행 잘 마치고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가시길. 그리고 막내를 포함, 가족들 모두 평생 잊지 못할 추억 되새김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p.s. 사진까지 찍는 아빠들은 특히 더 피곤합니다. 아래 사진은 2012년 여름 여행 중 찍은 사진입니다. 보기엔 평화로울지 몰라도 저는 무거운 카메라 들고 앞서 뛰다 쪼그리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눌리는 복부 압박으로 인해 얼굴은 시뻘게지고.. 혈압으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참고로 이 글은 201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학교 다닐 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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