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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 강사 작가 Apr 13. 2022

일상이 떳떳해야 쓸 수 있다

손정 에세이 (부제 : 철쭉 피는 비오는 봄날)

6시 20분에 맞춰 놓은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 적은 없다. 5시 50분이면 눈이 떠지고 30분간 ‘아직 멀었구나’하면서 이리저리 몸을 굴리고 스트레칭도 해보다 정확히 6시 20분에 벌떡 일어난다. 안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는 아내는 방문 여는 소리만 내줘도 눈을 뜬다. 아침은 근대 된장국을 끓이기로 어제 밤부터 생각해 두었다. 김치냉장고 맨 아래 칸에서 쌀 한 컵 반을 꺼내 밥을 앉히고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낸다. 근대국이라고 해봐야 들어가는 건 근대, 된장, 두부, 파가 전부이므로 크게 준비할 것은 없다. 시든 근대가 물을 먹도록 양푼에 담가 두고 어제 저녁 설거지를 한다. 네 식구 설거지는 아무리 양이 많아도 20분이면 충분하다. 반복해서 들어도 그때 뿐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을 다시 한번 죄어 보겠다고 즉문즉설 유튜브 영상을 틀고 이어폰을 꽂는다. 오늘 주제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다. ‘나쁜 환경에 처하면 나쁜 물이 드는 사람, 물 들지 않기 위해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않는 사람, 가서도 물 들지 않는 사람, 가서 나쁜 환경 속에 있는 사람에게 나의 좋은 물을 들여 버리는 사람. 범부중생, 현인, 성인, 해탈한 사람. 해탈은 못 하더라도 성인까지는 되어 보라’ 벌써 열 번도 넘게 들어 다음 문장이 무엇인지도 아는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 나의 다음 행동도 예측하지 못한다. 


설거지는 다섯 개 단위로 한다. 수북이 쌓인 그릇을 보며 ‘일단 다섯 개만 닦아 보자’ 하고 다섯 개를 모두 닦으면 다시 ‘다섯 개만 더 닦자’ 하면 벌써 열 개다. 그릇 열 개만 개수대에서 사라져도 ‘언제 끝내나’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육수가 끓으면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고 된장을 한 숟가락 푼다. 새우젓을 조금 넣을까하다 관둔다. 대신 양조간장을 차 숟가락 하나 넣는다. 파 흰 부분을 조금 썰어 넣고 두부도 충분히 간이 배도록 일찍 넣는다. 근대국이 맛있으려면 근대의 양을 충분히 넣어 향이 국물에 우러나게 해야 한다. 너무 삶아도 안되므로 먹기 10분 전에 넣는다. 아침 식사는 국이나 찌개 하나에 새로운 반찬 하나만 더 하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있는 김치, 시금치 무침, 새발나물, 오징어채 볶음. 김을 꺼내 놓는다. 새로운 반찬이라야 계란 후라이나 소시지 볶음이지만 오늘은 계란을 풀고 팽이 버섯을 잘게 썰어 넣어 팽이버섯전을 해본다. 국그릇에 후추, 소금을 뿌리고 계란 세 개를 깨서 넣는다. 쌀가루를 조금 넣어 찰기를 더해주고 백 번만 젓자 마음먹고 숟가락을 돌린다. 한 방향으로만 돌리면 덜 풀어질까 반대 방향으로도 돌려본다. 계란을 후라이판에 직접 깨서 익히는 것보다 그릇에 저어서 익힐 때 더 부풀어나는 이유가 공기가 들어 갔기 때문인지 계란 조직이 늘어나서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계란을 휘젓는 이유는 노른자를 싫어하는 딸아이 때문이다. 후라이해서 주면 땅콩 껍질 벗기듯 노른자에서 흰자만 분리해내 먹는 탓에 애초에 분리할 마음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노른자가 뇌의 먹이가 되어 머리가 좋아진다는데 안 먹게 할 수는 없다. 


아침은 7시 20분에 먹는다. 7시 35분에 출근하는 아내는 서서 먹으면서 커피를 뽑는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들은 아침을 마저 먹고 이를 닦고 영어 단어를 한 페이지 외우고 8시 10분에 집을 나선다. 물병을 뜨거운 물로 소독해서 정수기 물을 담아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진정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우선 빠르게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청소기로 거실과 주방, 세 개의 방에 먼지와 머리카락을 빨아 들인다. 빨아서 말려둔 걸레에 물을 묻혀 꾹 짠 다음 대걸레 바닥에 고정하고 청소기가 지나간 자리를 닦는다. 면도하고 이를 닦고 세수하고 책상에 앉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첩에 오늘 할 것을 적는 일이다. 다음 주 강의 교재 만들기, 블로그에 글 올리기, 메일 보내기. 몇 가지가 오늘 페이지에 얹혀진다. 첫 번째 할 일을 하기 전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으며 머리를 풀어주는 작업을 하는데 가끔은 주객이 전도되어 한 시간 넘게 읽어 버리기도 하지만 20분 정도의 독서는 나를 공부로 쉽게 이끌어 준다. 오늘 준비할 강의 교재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자녀 글쓰기 교육’이다. 글쓰기가 왜 중요하며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고력 향상과 더불어 성적까지 높여 주는지 이야기하고 부모가 집에서 글쓰기 교사 역할을 할 수 있게 강의하고 실습한다. 예시 글을 주고 주제 찾기, 핵심 단어 찾기, 단락 별 요약하기를 통해 글 한 편의 구조를 파악해 본다. 남의 글 구조를 파악할 수 있어야 내 글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내 글 구조는 주제 만들기, 소재 도출하기, 소재를 묶어 흐름 만들기로 강의 내용을 구성한다. 내 글 개요표가 만들어지면 소재에 살을 붙여 문장으로 풀어 내는 법을 이야기하고 실습한다. 수업에서 배운 내용은 집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자녀가 쓴 글을 첨삭할 수 있도록 간결한 문장, 보이는 문장, 읽히는 문장의 조건도 사례로 보여 주고 못난 문장을 고쳐보는 실습도 한다. 이미 여러 차례 해 본 강의라 기본 교재는 있고 그 간에 공부해서 추가된 사례를 넣고 실습 방법을 조금 변경하고 이번 강의 시간에 맞게 대본을 작성하고 마무리한다. 


책 읽고 교재 하나 수정하면 오전이 금방이다. 점심은 지난 달부터 와서 밥 먹고 가라는 부모님 댁에서 먹기로 한다. 4월 들어 처음 비가 내린다. 우산을 들고 나선다. 4월 초순의 비는 벚꽃의 끝을 앞당기고 있었다. 벚꽃 다음 차례는 철쭉으로 여차하면 피어 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 분홍, 하양, 빨강의 크레파스를 곧추 세워 놓은 듯 길가를 덮고 있었다. 20분을 걸어 도착한 부모님 댁 앞에서 과일을 사려고 마트에 들렀다. 비닐 하우스의 일반화로 제철 과일의 의미가 ‘과일의 생육 조건에 맞게 생산되는’이 아닌 ‘많이 출하되는’으로 바뀐 지금 마트 과일 진열대는 참외, 토마토, 천혜향, 오렌지, 칠레 포도가 차지하고 있었다. 천혜향 한 팩에 만 원, 방울토마토 한 팩에 칠천구백팔십 원에 사서 부모님 댁으로 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 가니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계시고 어머니는 닭을 삶고 계셨다. 생더덕을 까서 무쳤는지 집안은 백숙 속에 들어간 오가피, 엄나무와 함께 한약 냄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11월에 김장하여 4월까지 먹게 되면 새 김치가 생각난다. 신맛에 싫증난 입이 풋내를 부른다. 어머니가 차린 상에는 새로 담근 깍두기와 얼갈이 겉절이가 생더덕 무침과 함께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야구 이야기, 오촌 조카 삼수하는 이야기, 공부는 잘했지만 의대를 못가서 라는 이유와 함께 공부에 집중하려고 아직까지 휴대폰이 없다는 점은 칭찬으로 덧붙였다. 시골 당숙모 돌아 가신 이야기와 자식되는 육촌 형님, 누나가 효자, 효녀라는 이야기로 백숙 그릇도 비워졌다. 


싸주신 더덕무침과 얼갈이 김치를 들고 나오니 자신의 봄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빗속에서도 라일락은 보랏빛을 키워 가고 있다. 오후에는 직장인을 위한 글쓰기와 발표법 강의에 대해 연구해서 교재를 만들어야 한다. 많은 일을 하고나서도 아직 하루가 절반이나 남았다. 바쁘면 시간이 빨리 가지만 밀도 있게 살면 더디게 간다. 시간의 모든 순간이 내 몸 깊숙이 머물다 가기 때문이리라. 밀도가 있는 일상은 떳떳하다. 일상이 떳떳한 날 글도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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