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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공부 Jun 08. 2023

문구에 집착하는 이유

-둘째라서 서러워요(1)-

“나 이거 한번 칠해봐도 돼?”

나는 내 짝의 48색 왕자파스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12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주색을 가리키며 물어봤다. “응 그냥 이 중에서 네가 칠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써도 괜찮아”

나는 너그러운 친구의 한마디에 마음이 급해지고 들떴다.

그래서 사람 다리 한 짝은 자주색으로, 한 짝은 연보라색으로 칠했다. 한 가지 색을 많이 써버려서 많이 닳으면 친구가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려낸 그림은 마치 외계인이 그린 것 같았다. 미술시간이 유독 싫었던 이유는 준비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질이 없어서인지 준비물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술만큼은 자신이 없었는데 5학년 때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나조차도 어리둥절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여름에 대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좋아서 추천해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받은 미술 관련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둘째 딸이다. 어릴 적 나의 모든 물건에는 내 이름이 아닌 언니 이름이 잔뜩 붙어있었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책가방, 신발주머니, 크레파스, 스케치북 할 것 없이 온통 언니이름이 붙어있는 물건들로 책가방이 채워졌다. 언제면 오롯이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소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당연한 일로 여기며 제발 언니가 물건을 험하게 쓰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지금도 문구점에 가면 필통, 볼펜 수첩 등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필요하지 않은데도 자꾸 사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볼펜은 제트스트림 4색 볼펜이다. 색깔별로 모아 0.38, 0.5, 0.7 볼펜심을 잔뜩 사놓고 바꿔 끼워 쓰고 있다. 볼펜심이 떨어질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내가 뭔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필통도 계절 따라 뽀글이 필통도 사고 여름에는 시원한 투명 필통에, 형광펜과 볼펜을 분리할 수 있는 2층 필통도 있다. 강연 다닐 때 가방에 넣고 다니는 아주 작은 필통까지.... 게다가 노트는 하나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하면 세트로 몇 개씩 더 구입한다. 필요할 때 그런 제품이 다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책상 속 서랍 두 칸은 새 노트로 꽉 차있다. 마치 쌀독에 쌀이 그득한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좋다.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전국의 중학교 교복이 똑같을 때였다.

비록 언니와 다른 중학교에 배정되긴 했지만 3살 터울인 언니의 교복은 당연한듯 내 손에 쥐어졌다.

덕분에 입학식 날부터 빤질빤질한 교복을 입고 나타난 나에게 선배인 줄 알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점점 키가 크고 6년째를 맞은 교복 소매는 올이 풀리기 시작하여 마음먹고 내가 잡아당기면 팔 한짝이  없어질 수도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새 교복을 입을 수 있는 고등학생이 된다는 생각에 참고 견디긴 했지만 …


고등학교 배정 발표가 있던 날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았다. 나는 언니가 다니던 학교만 아니면 된다.

내게 주어진 02번은 바로바로 OO여고!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역시 효녀 딸이라며 기뻐하셨고 나는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방문을 닫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재수가 없나? 졸업식을 마치고 교복을 찢으려는 언니를 향해

“언니는 참 이상하다  의대간 기념으로 교복을 잘 보관하지 그걸 굳이 왜 찢어?”라고 했던 내입을 잡아 뜯고 싶었다. 엄마는 우는 나를 달래며 말씀하셨다.

“엄마는 네가 정 그렇게 언니교복 물려 입기 싫으면 그냥 사줄게

어차피 고등학교는 교복 물려 입히기 어려울 줄 알고 엄마가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어

그런데 언니 의대 등록금이 좀 비싸야지... 아까는 솔직히 교복을 물려 입히려 했거든”

평소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않았는데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폭발한 모습에 엄마도 당황하신 듯했다.

그날 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니 나의 운명처럼 여겨졌다.

그래 교복이 헌거면 어때? 공부만 잘하면 되지.... 나는 아빠 없이 ,직업도 없이 (당시에는 여자들이 가질만한 직업이 딱히 없었음) 그냥 있는 돈을 쪼개서 살고 있는 우리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시 3년을 버텨보기로 했다.


언니가 간암으로 아파서 밥도 잘 못 먹고 힘들어했을 때 전복죽을 만들어 갔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 끝에 교복이야기며 둘째로서의 설움에 대해 내 딴에는 언니를 웃겨주려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언니의 말 한마디에 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랬니? 난 그런 거 잘 몰라”

역시 언니는 자기 일이 아닌 거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구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랬었니? 많이 속상했겠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나는 헌 교복 때문에 창피하기도 했고 속상했던 날도 있었는데 그런 사실조차 기억이 안 난다는 언니말이 두고두고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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