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나의 교단 이야기(2)
# 학교 분위기
당시에는 대부분 1반 담임이 학년부장을 맡던 시절이었다.
멋모르는 친구는 어떻게 발령받자마자 학년부장이 되었냐며 깜짝 놀란다.
우리 학교는 3학년 3 학급이라 3-3반만 여학생과 남학생 혼반이었고 여학생은 무조건 1반 남학생은 2반이었다. 그러니 여학생을 주로 가르치는 나는 당연하게 1반 담임이 된 것뿐이었다. 또 교무실 전체 교사가 12명이라 가족적인 분위기다 못해 서로의 사생활이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전화도 학교번호로 오면 누군가가 받아서 바꿔줘야만 했다. 그래서 자주 전화를 걸어오는 상대를 보면 곧 누가 결혼하게 될지 쉽게 가늠할 수 있기도 했다.
당시 이천에는 식품생산 공장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농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다.
하루는 우리 반 00 이가 경운기를 끌고 학교를 와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농번기라 바쁘다며 조퇴를 하기 위해 급하게 왔다는 것이었다. 4월이면 모내기 방학이 있었다. 만약 그때 수업을 하면 많은 아이를 결석시키고 일손을 돕게 하는 가정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이들은 다양한 체험을 해본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크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당시 멀리서 차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은 하루에 몇 번 오가지 않는 버스 시간을 지키기 위해 방과 후 학습지도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 나는 스스로 왕따이기를 자처했다
나는 국립 사범대학을 나왔다. 쉽게 말해 졸업하면 발령이 나는 특채생이었다.
요즘같이 어렵게 공채를 거쳐 교단에 서게 된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거저먹은 떡이라 폄하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4년 내내 교사로서의 사명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주어진다.
심지어는 하루 종일 서서 수업할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일부러 서있는 연습을 할 정도였다. 우리 학교 12명 교사 중에는 교감 선생님 포함 5명 정도가 기존에 근무하던 선생님이셨고 나머지 7명 모두가 신입교사였다.
자연스레 신입끼리는 서로 의지하고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부분 학교 근처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하였고 나만 서울 집에서 통근을 했기에 밤에도 가끔씩 서로 어울리는 그들과도 또 다른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농담에 끼어들지 못했고 혼자 왕따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수업하기도 너무 벅차 그런 것은 문제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또래보다는 선배교사들로부터 그들의 교육노하우를 배우고 학교일에 적응해 나가고 싶은 욕심이 컸다. 지금 같으면 농어촌 점수를 받을 수 있어 서로 가려는 학교였겠지만 그 당시에는 빨리 다른 학교로 옮겨가는 사람이 능력자로 여겨졌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너무 예뻤다. 점심시간이 되면 계속 교무실을 서성이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삶은 고구마 두 개, 밭에서 뜯어온 상추 등을 가지고 와 선뜻 내밀지 못했다.
이를 알아차린 체육선생님 덕에 불려 나갔더니 몇 명의 아이들이 부끄러워하며 감자, 고구마 옥수수 삶은 것 등을 내밀고 도망치듯 교실로 가버리곤 했다. 밥만 가지고 가면 반찬은 다 해결될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 예쁜 아이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