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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공부 Jul 15. 2023

엄마가 천국으로 이사하신날

- 천국에서 늘 지켜보고 계신것 잘 알아요-

“아고 저거 우리 아들학교교복이네! 우리 아들이 올해도 반장 하느라 욕본다”

나는 엄마 옆자리에 앉아 버스를 타고 갈 때마다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냥 혼잣말인 듯한데 늘 아들자랑, 딸자랑을 뜬금없이 하는 통에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하긴 언니도 전교 1등, 남동생도 전교 1등을 하여 시험이 끝날 때마다 상장과 상품을 받아오고 장학금을 타오니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셨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교 1등을 못한 거 빼고는 모든 면에서 효녀라고 인정받았다.

아빠없이 우리 삼남매를 그것도 아무 직업도 없이 지혜롭게 키워낸 엄마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

언니는 공부는 잘했지만 가고싶지 않은 의대를 엄마의 고집때문에 억지로 갔다는 생각에서인지 늘 엄마속을 썪였다.

대학에서 재시험, 유급, 심지어는 출석일수 미달까지 각종 색색종이를 다 받아서 엄마를 여러번 쓰러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더 착한 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여 오히려 생활비를 보태주었고 나는 못 신어봤어도 에스콰이어 부츠를 사서 엄마에게 내밀때 내 마음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쌓아 올린 신뢰와 효녀라는 명칭이 하루아침에 날아간 건 엄마가 그렇게 반대하는 결혼을 한 것 때문이다.


엄마의 마지막 재산을 다 털어 아들까지 결혼을 시키고 엄마는 아들내외와 행복한 날들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동생네와 함께 살기는 어려울 것을 직감했다.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함께 살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장모를 모시고 살게 된 남편의 힘든 마음을 나는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엄마는 늘 자식한테는 지극정성인 편이어서 나는 직장생활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가끔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냉장고에 과일이 썩어나간다는 동료들의 말에도 공감을 못했고

아이가 잠을 안 자 너무 힘들다는 말도 그냥 그랬구나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우리 아이들은 저녁에 씻고 우유를 한번 먹이면 아침까지 잘 잤기 때문이다.

정말 두 아이를 거저 키운 느낌이다.

그렇게 엄마는 둘째가 6살까지 두 아이를 잘 키워 주셨다.


방학을 하여 한가한 마음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큰 아이는 걸려서 시장구경에 나섰다.

지나가는데 나는 모르는 아줌마들이 한 마디씩 해댄다.

"애들 엄마는 오늘 처음보네....방학했나봐 이시간에 아이들과 나온걸 보니

 매일 할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나오시더니...

 저녁에 애기 엄마 오면 피곤하지 않게 아이들이 일찍 자야 한다면서 동네를 몇바퀴를 도는지 몰라 ”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맛깔나게 잘 읽어줘서가 아니었구나

엄마의 하루가 그렇게 머릿속에 그려졌었다.


효도한답시고 건강검진권을 끊어 드린 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고 식사도 잘하셔서 몰랐는데 간암이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한 번의 항암 치료 후 엄마는 자신의 병을 알아차리고 지방의 건강원에 들어가 버리셨다.

 자연식으로 치료를 한다는 곳이었다. 늘 걱정되고 불안했지만 달리 어쩔 방도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치료가 잘 되고 있는 줄만 알았다.


 “딸!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

“엄마 먹으면 되지 왜? 못 먹게 해?”

“응 여기선 짠 거 못 먹게 해”

“된장이 몸에 좋다며 왜 그런데? 그러니까 그냥 올라와서 우리 집에서 병원 다니자 엄마”

“아니야 괜찮아”

이게 마지막 통화일줄 알았더라면 난 어떻게 말을 했어야 할까?

지금도 그 마지막 전화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마다 생각나는 엄마의 “된장찌개 먹고 싶어”

..............

새벽에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내가 엄마와 통화한 내용을 전했더니 언니가 엄마를 찾아갔다.

언니와 밥을 먹고 목욕을 시켜달라 해서 목욕을 하고 누웠는데 갑자기 쇼크가 왔다고 했다.

나는 급하게 119를 불러 내려가서 엄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오늘 길에 전북대 병원에 들러 응급처치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학교는 어떡하고?"였다.

다행히 oooo 병원에 도착해서 수속부터 밟으라는 야박한 말에 손을 벌벌 떨어가며 간신히 접수하고 돌아선 게 불과 몇 분이 지났을까? 그사이 엄마는 의식을 잃었다.

결국 그렇게 허망하게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불러가셨다.


엄마를 떠나보낸 후 내 마음속에는 시가 몇편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뭔가 글로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때의 감정을 다 쏟아냈다면 한 권의 책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매일매일 엄마생각만 났다.


참 세월이 야속도 하다.

이제 꿈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엄마의 기억이 점점 흐려진다.

다만 가끔씩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 속에 엄마와 나는 닮아 있다.


엄마 나이 59세!

우리 아이들 다 키워놓고 편하게 쉬셔야 할 때 가셔서 너무 속상하다.

아니 어쩌면 우리 아이들을 돌보시느라 힘드셔서 병이 생긴 것 같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언제나 내 아이들보다 나를 위주로 생각하신 엄마!

그러면 네 엄마 힘들다고 아이들을 야단치는 말이 못마땅해서 핏대 올리던 못된 딸이 이제야  엄마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눈물 흘리고 있네요.

둘째라 서럽다고 울부짖었는데....

우리 아이 둘다 공단같이 예쁘게 잘 키워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 꼭 하고 싶은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엄마가 천국으로 이사하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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