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37~8도를 넘나드는 열기에 채솟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마트에 나가보면 뭘 집어 들어야 할지 망설여지기만 할 정도로 채솟값이 너무 비싸다. 고기보다는 푸성귀를 좋아하는 나는 큰맘 먹고 열무 3단을 샀다.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밀가루 풀부터 쑤었다. 풋내를 없애기 위함이다. 풀물이 식기를 기다릴 동안 열무를 손질했다.
나물을 손질하면서 생각해 보니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열무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그 많은 양을 담아서 혼자 어찌 다 먹을지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담근 물김치가 가장 맛있다며 물김치 안 담느냐고 보채는 친구가 있기도 하거니와 내가 담그는 물김치 솜씨라면 마다할 사람은 없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무김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는 어떤 누군가가 그리워서인지도 모른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열무김치를 나는 실패도 없이 잘도 담근다.
비가 온 후 어느 집 텃밭에는 아기 손가락만 한 열무 순이 여름 바람에 야들야들 춤을 춘다. 뙤약볕에 작물이 시들시들 말라가도 열무는 하얀 뿌리를 땅속에 박고 한여름을 난다. 상큼한 풋내는 잃었던 입맛을 깨운다. 다른 양념 없이 열무에 고추장만으로도 혀를 살살 녹이는 매력은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연초록의 물결은 먼바다의 전설처럼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나를 데려간다.
아버지는 여름이면 열무김치를 즐겨 드셨다. 순이 막 올라올 무렵이면 야들야들한 여린 싹을 뿌리째 솎아서 김 올라오는 꽁보리밥에 고추장 한 숟가락 넣고 쓱쓱 비비면 밭으로 돌아갈 것만 같이 펄펄 살아나던 열무 순이 슬그머니 수그러지면서 먹기 좋게 버무려졌다. 아버지는 커다란 양푼에 한가득 밥을 비벼서는 잘도 드셨다. 비벼놓은 열무 비빔밥은 보기에 그리 맛나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더럽다고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한 술 맛보겠냐고 묻는 아버지께 나는 손사래를 치곤 했다. 유달리 생나물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식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 지금은 아버지의 식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부전여전이라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음식을 나도 즐기고 있다. 열무를 다듬으며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의 토막들과 추억들을 올올이 풀어서 되새기는 시간. 열무를 다듬는 시간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만나는 시간이다. 내가 담근 열무김치 잘 익혀 한 사발 드리면 좋으련만……. 어느덧 열무는 다 다듬어지고 함지박 가득 쌓인 나물을 수돗물에 깨끗이 씻어 건진다.
마늘을 다지고 매실액, 멸치액젓 약간, 붉은 고추를 믹서에 거칠게 간다. 양파와 청양고추를 채 치고 소금 간 맞춘 풀물을 부어놓고 숨이 죽기를 기다린다. 얼추 숨이 죽었다 싶으면 남은 풀물로 나머지 간을 맞춘다. 통에 담아서 한나절을 두면 새콤하고 은근한 익은 내에 군침이 돈다. 그러면 냉장고에 넣어 맛을 들인다. 잘 익어 칼칼한 열무김치 한 통은 물김치 타령에 여념이 없는 친구에게 건넸다.
염소도 토끼도 아니면서 채식주의자에 가까운 나. 음식을 만들어서 먹기 보다 만들기를 즐기는 나. 내가 공들여 만든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큼 큰 기쁨도 없다. 채 맛이 들지 않은 열무김치를 한 국자 떠서는 밥 한 공기를 단숨에 비워냈다. 트림하니 풋내가 목구멍을 역류해 올라온다. 시금털털한 냄새가 남이 맡으면 역할 수도 있는 트림을 한바탕하고 나면 비로소 흐뭇한 나. 예전에 아버지도 그랬다. 양푼 한가득 열무 비빔밥을 드시고 나면 늘 끝은 게트림이었고 나는 더럽다며 코를 싸쥐었다. 그런 내 모습을 허허 웃으시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아버지.
엄마는 밭에서 딴 붉은 고추와 마늘을 큰집 돌절구에 찧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고춧물을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열무에 끼얹고 버무리면 손에 왈왈 불이 난다고 했다. 손 맵기가 시집살이보다 더 맵다고 하면서도 매번 맨손으로 버무렸다. 전기모터로 돌아가는 믹서보다 돌절구에 찧어 거친 양념으로 담근 김치가 더 맛있는 거야 말해 무엇 할까. 푹 퍼진 보리밥에 칼칼한 열무김치 덥석 얹어서 짜글짜글 끓인 된장찌개에 쓱싹쓱싹 비벼 먹을 생각만 해도 입안에 흥건하게 군침이 돈다.
주변에 열무김치 담글 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 만큼 열무김치는 여름이면 으레 먹는 음식이 아니라 별미가 되었다. 하지만 예전엔 달리 먹을 반찬이 없었기에 열무로 여름을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 찬이라야 멀건 된장국이나 열무김치였으니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질리듯 열무인들 그러지 않았을까. 쇠풀을 바소쿠리에 산처럼 쌓아온 아버지의 검은 얼굴에서는 비지 같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기름기 없이 푸성귀로만 먹는 일상에 허기가 지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진 반찬 투정 한번 없이 양푼에 열무를 넣고 비볐다.
식구는 밥을 같이 먹는 가족을 의미한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정이 깊어진다는 것. 밥상머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자매끼리 눈을 흘깃흘깃 다투기라도 할 요량이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부모님의 의견이 맞지 않으면 언짢은 마음에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은 적도 있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기차 화통 삶아 먹는 소리를 들을 만큼 벌컥 화를 내시기도 했지만 안 좋은 기억은 녹아 사라지고 잔여물은 아버지의 환한 미소다. 김소월은 ‘먼 후일’이라는 시에서 떠나간 임을 잊을 수 없는 심정을 노래했다면 나는 열무김치를 담그며 먼 훗날을 기다리고 있다.
붉은 고추 갈아 버무린 열무김치에 잘박잘박 벌건 국물 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겹친다. 일소처럼 농사일에 허덕이다가 뭐가 그리 급한지 자식들이 미처 장성하기도 전에 위암으로 세상을 등진 아버지에게 딱 한 번 생신상 차려드린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다. 살아계신다면 둘째 딸이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다 발휘해 아버지께 칼칼한 열무김치 한 사발 대접하고픈 여름이 왔다. 순간 눈앞이 부옇게 시야를 가린다.
나는 아버지가 그리운 만큼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음식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다. 여름 내내 열무김치를 즐기시던 아버지, 그랬기에 여름이면 더욱 생각나는 얼굴. 열무김치 양념에 칼칼하고 삼삼한 추억도 한 줌 집어넣는다. 추억이라는 양념이 한 움큼 보태졌으니 맛은 더욱 알싸하고 감칠맛 나지 않을까. 내가 열무김치를 담그는 것은 단순히 요리가 아닌 기억의 창고에서 그리움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