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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배꼽

by 글마루

배꼽, 배꼽의 사전적 의미는 ‘탯줄이 떨어지면서 배의 한가운데에 생긴 자리’이다. 요즘은 그 용어가 별로 생소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사람의 생식기나 마찬가지로 약간은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계의 중심을 ‘옴파로스(배꼽)’라고 하고, 오쇼 라즈니쉬는 「배꼽」이라는 책에서 인도 문화의 사상과 철학을 우화적으로 담았다. 이렇듯 배꼽은 단순히 신체 부위만을 의미하지 않는 상징성이 있다. 사람 몸의 중심은 ‘배꼽’이다. 사람이 태어난 흔적, 그리고 태아와 엄마를 연결해주는 생명의 줄이 바로 ‘배꼽’이다.


난 댓 살 무렵 내 배꼽 말린 것을 보았다. 우리 세 자매의 배꼽을 보관한 시렁 위, 고리짝 속에 고이 보관해온 내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배꼽이라기에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명실에 묶인 배꼽은 말라서 꾸들꾸들하고 갈색이 났다. 어렸지만 내 몸의 일부라는 것이 신기했다. 아버지는 훗날 내가 어른이 되면 그것을 주겠노라고 하셨다.


자라면서 내 머릿속에는 그 배꼽이 항상 맴돌았다. 왠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연관된 뭔가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든든하기도 했다. 그것이 놓여있는 고리짝이 보물 상자처럼 생각되었다. 난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가구인 고리짝을 누가 노리고 훔쳐 가지 않을까 자주 확인하고는 했다. 배꼽이란 것이 아주 귀한 것이라서 누가 욕심을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우리의 배꼽 말고도 아버지의 도장과 차용증 같은 문서가 있었다. 아버지는 이따금씩 그것을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열어보시고는 했다. 말 그대로 고리짝은 나무판자로 만들어 종이로 붙인 볼품없는 것이었지만, 난 그게 우리 집의 가보처럼 귀하게 생각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저금을 가져오라고 했다. 당시 우리는 백 원씩을 대부분 저축했었다. 물론 그 돈도 없어 못 가져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백 원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특히나 우리 집 형편에는 더욱더 큰돈이었다. 아버지는 돈이 없다고 하셨다. 나를 피하듯 김을 매러 밭으로 가셨다. 난 부모님 말씀도 잘 들었지만, 학교 입학하면서 아버지가 당부하신 ‘선생님을 부모와 같이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새기고 있었다. 선생님이 저금을 가져오라고 했으니 응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져가야 한다고 여겼다. 밭으로 가보니 아버지는 호미로 풀을 뽑고 계셨다. 난 아버지가 입학할 당시, 내게 하셨던 당부를 상기시켜 아버지를 쩔쩔매게 했다. 어린 자식이 맹랑하게도 아버지가 한 얘기로 꼼짝 못 하게 가둬버린 것이었다.


결국 내 고집과 주장에 못 이겨 아버지는 밭을 매다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고리짝을 내려서는 그 안을 이 잡듯 뒤지셨다. 오십 원짜리 동전이 하나 나왔고, 난 그것을 들고 학교에 가서 저축했다. 선생님은 오십 원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시며 칭찬해주셨다. 이후 난 고리짝을 더 귀하게 여겼다. 저금을 가져오라고 하면 아버지를 채근했고, 거기서는 신기하게도 없다는 돈이 나왔다. 그것은 항상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시렁 위에 얹혀있었다. 그 속이 궁금했지만 안을 열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우리가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는 나를 나무라기보다는 대견해하셨다. 나름 논리적인 말로써 주장을 말하는 내가 기특하고, 선생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하셨다. 아버지를 닮은 나는 곧이곧대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한마디로 ‘부전여전’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융통성이 부족해서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소처럼 묵묵히 부지런하게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남들은 경운기로 농사를 짓는데 우리 집은 계속 지게였고, 소가 밭골을 키고 논을 삶았다. 물론 경운기로 농사짓기 힘든 다랑논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제나 시커먼 장화를 신은 채 지게를 지고 소 먹일 풀을 한가득해 오셨다. 그리고 겨울이면 눈이 오든 거르지 않고 나무를 해 나르셨다. 그것으로 우리는 따뜻한 구들장에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도 고리짝은 함께였다. 기와집으로 이사 갔을 때 우리 집은 유일하게 문서가 생겼다. 그전까지는 아버지 소유로 된 것이 전혀 없었다. 역시 집문서는 시렁 위 고리짝에 고이 모셔졌다. 고리짝은 손때가 묻고 오래되고 절어서 눅진한 고린내가 났다. 할아버지 냄새 같기도 한 그것을 나는 옛날 냄새로 정의 내렸다. 일찍 철이 든 나는 그 이후에는 저금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렸을 때 그런 나를 아주 착실하고 생각이 깊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언제인가부터 그 고리짝은 눈에 띄지도 않았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제 생각해보면 우리 집의 배꼽은 낡은 ‘고리짝’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생을 함께 했다. 그랬기에 지금도 보물처럼 생각나는 것은 아닐까. 고리짝에는 금은보화보다 귀중한 아버지 인생이 들어있었다. 아무나 손대어서도, 함부로 만져서도 안 되는 아버지의 ‘배꼽’이었다.


※ 2018년 구미문예공모전 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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