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 타는 소녀
집 근처 공원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다. 한낮의 지루함을 뚫고 아이의 몸은 그네와 하나가 되었다. 무릎을 굽히고 그넷줄 잡은 팔에 잔뜩 힘을 준 채 힘차게 그네를 밀고 있다, 그네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가 하더니 반동에 의해서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하다. 그 옛날 나도 저 아이만 할 때는 내 힘껏 다리를 굴려 공중 그네뛰기에 신바람이 났었다.
빈자리가 나기에 잽싸게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드디어 내게도 그네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앉자마자 웬 까까머리 남학생이 비키라며 그네를 낚아챘다. 나보다 한두 학년 위의 남학생으로 보였다. 나는 혹시 거부했다간 자칫 코 묻은 주먹에 한 대 쥐어박힐까 봐 지레 겁을 먹고 반사적으로 자리를 비켜줬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 마을 쌍둥이네 큰형이 그 남학생에게 그네를 돌려주라고 했다. 6학년이자 어린이회장이기도 한 쌍둥이네 큰형의 말은 곧 법이었다. 새까만 얼굴, 머리에는 수동 삭발면도기에 씹힌 자국이 선명한 그 아이는 끽소리 한 마디 못하고 그네를 내어줬다. 난 구세주처럼 나타난 오빠가 사라지면 곧 다시 뺏길 두려움에 쭈뼛쭈뼛 그네를 잡고 그를 쳐다봤다. 그걸 알아챘는지 그 아이에게
“그네 뺏기만 해봐라. 그냥 안 둔다.”
라며 오빠는 엄포를 놓고 사라졌다. 이제 그네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모심기 준비가 한창일 때였다. 4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앉은 그네가 나는 지루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그네를 탔다. 내게 그네 타기는 신데렐라가 잃어버린 유리 구두를 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영영 다시는 그네를 탈 수 없을 것처럼 시간은 정지된 듯했다. 학교 운동장에 달랑 두 개뿐인 그네는 새내기들의 차지가 되기 어려웠다. 위로 서슬 퍼런 언니, 오빠들이 까마득하기에 꿈도 꾸기 어려웠다. 어느덧 고학년들도 모두 하교하고 학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아직 서산마루에 해가 걸려있었기에 마음 놓고 그네만 탔다.
이젠 일어나서 집으로 가야 할 시간,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꽤 정겨웠다. 마치 귓전에서 ‘더 놀다 가지 지금 가느냐?’고 속삭이는 듯했다. 난 책보자기를 허리에 을러메고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학교 개구멍 울타리 아래가 큰집이었기에 사촌인 줄 알았다. 곧 내게로 오겠거니 기다리며 계속 그네를 탔다. 서쪽 산 너머로 노을이 발갛게 하늘을 물들였는데 그 몽환적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내게 노을이 자꾸만 더 놀다가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서쪽 산 너머로는 석양이 뉘엿뉘엿 잠이 들고 어둑발이 내렸다. 이젠 노을도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물체가 식별되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서움과 더불어 아버지의 당부가 떠올랐다. 어디 갈 때는 꼭 행선지를 알릴 것과 해가 지기 전에는 무조건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이었다.
서둘러 밤길을 재촉했다. 집으로 가는 신작로에서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하교하는 언니, 오빠들을 만났다. 다들 “너 왜 이제 집에 가냐.”라고 한마디씩 했다. 난 의기도 양양하게
“그네 타다가 가요.”
라고 개선장군처럼 대답했다. 그들은 꼬맹이가 겁도 없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신작로는 둘러 가야 하고 재를 곧장 넘으면 바로 아래가 우리 집이었다. 캄캄한 하늘엔 언제 돋아났는지 별들이 반짝이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달도 밝지 않아 희미한 별빛에 의지하며 용감하게도 재를 넘었다. 매일 넘나드는 재였지만 어두워진 밤길을 그것도 여자아이 혼자 넘는지라 내심 겁을 먹었다. 혹시 호랑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나 하며 누구에게 쫓기듯 달음박질을 쳤다.
어둠을 뚫고 도착하니 집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나를 찾으러 수소문하러 나가셨다. 함께 등하교하는 친구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내 행방을 물으셨다고 한다. 찾다가 지친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 당신 딸을 누가 유괴한 건지, 아니면 누구한테 맞아서 쓰러져있는 건 아닌지 별별 걱정을 다 하셨다며 이렇게 깜깜할 때까지 뭘 했냐고 물으셨다. 난 그네를 타느라 늦었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그네를 왜 깜깜할 때까지 타냐며 낮에 실컷 타라고 하셨다. 난 어렵게 그네를 잡아도 언니, 오빠들이 다 뺏어서 못 탄다고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누가 그네를 뺏는지 알려주면 혼내주겠다는 말씀으로 우는 나를 달래주셨다.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이니 누구든 내리라고 하면 내리지 말고 달란다고 무조건 뺏기지 말라고 하셨다. 난 그네를 되찾아준 쌍둥이네 큰형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그 오빠는 내가 한 동네 아이라는 것을 알고 보호해줬다며 앞으로도 어려우면 그에게 얘기하라고 하셨다.
1학년과 6학년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였다. 난 누구인지 알았지만 어려워 말 한마디 못 해본 그가 친오빠처럼 든든했다. 위로 언니만 하나 있는 내게도 오빠가 있었으면 바란 적이 많았다. 위기의 순간에 슈퍼맨처럼 나타나 보호해준 오빠가 초등 시절 내내 든든했다. 꼭 그가 지켜주는 것 같아 그 후로는 위축되지 않았다. 물론 그네도 뺏기지 않고 탈 수 있었다. 그는 내 마음속의 큰오빠였다. 그네만 보면 항상 그가 떠올랐다. 마음씨 좋은 오빠는 분명히 훌륭하고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었다.
남동생네 방문해서 조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갔다. 그때의 내 나이와 비슷한 조카들은 그네를 밀어줄 때 깔깔대며 힘껏 발을 구르고 더 세게 밀어달라고 주문한다. 조카들의 신나 하는 표정에서 어린 날의 나를 읽는다. 천진했던 소녀에겐 그네 타기가 세상 전부였을지도. 어쩌면 넘어갈 듯 말 듯 발그레한 노을에 유혹당했지도 모른다.
그네에 다시 앉아보았다. 조심스럽게 몇 번을 왔다 갔다가 했다. 어린 시절 온 힘을 모아 구르면 하늘 끝까지 펄쩍 날아오르는 기분을 찾고 싶었다. 마음만큼 용기가 나지 않아 나지막이 흔들거리기만 했다. CF나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긴 생머리를 날리는 장면을 머릿속으로만 그리는 것으로도 벅차오른다.
난 여전히 생기발랄한 소녀다. 아련한 저 너머에 일곱 살 소녀가 깊은 눈동자에 꼭 다문 입, 조그만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하늘을 날고 있다. 조금만 더 높이 구르면 산도 들도 뛰어넘고 구름 위에 사뿐히 앉을 것 같다. 그 모습을 텅 빈 운동장과 하얀 바람만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