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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

by 글마루

마을 청년 세 명이 족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있었다. 큰샘 밑에 있는 작은 못에서였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 친척 아재가 족대를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지를 허벅지로 둘둘 말아 올린 채로였다. 잠시 후 몇 번 훑다가 밖으로 나왔다. 족대 속에는 어른 손바닥만 한 붕어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리고 아재의 다리를 타고 오르는 거머리 떼들이 있었다. 아재는 손바닥으로 툭툭 치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집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거머리 숫자가 워낙 많은지라 어떤 놈들은 아재 사타구니로 들어가려고 했다. 겨우 붙은 거머리를 잡아떼고 아재는 몇 번인가 족대를 들고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거머리들이 아재의 다리에 붙어서 피를 맹렬히 빨아대고 있었다. 양동이에는 제법 많은 양의 붕어가 들어있었다. 고춧가루 팍팍 넣어 매콤하게 요리하면 맛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붕어를 얻는 대가로 아재가 거머리에게 제법 많은 양의 피를 헌납하든 족대에 든 붕어만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보채기 시작했다. 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거머리가 많아서 안 되고, 못도 개인 소유라서 함부로 들어가서 잡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뭐든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는 결과물을 얻을 때까지 졸라댔다. 내 보챔에 지친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하셨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고집을 부리기만 하면 들어주는 아버지가 좋기도 했고, 고기를 잡는다는 사실이 설렜다.


그런데 고기를 잡으러 간다는데 족대도 낚싯대도 없었다. 한 손에는 삽이 한 자루, 또 한 손에는 대야가 전부였다. 작은 양동이는 내 손에 쥐어졌다. 이것으로 어떻게 고기를 잡느냐니까 잡을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물이 맑은 쟁이골로 갔다. 냇가라고 하기도 무색할 만큼 폭도 좁고 깊이도 아주 얕은 도랑이었다. 아버지는 물살이 세지 않는 곳에서 삽으로 흙을 떠서는 위아래에 둑을 쌓아서 막으셨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어떻게 고기를 잡겠다는 건지 의아심만 들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간 대야로 도랑에 있는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밑바닥에 물이 마를 때까지 대야로 긁는 작업은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원시적이라 여겼다.


흙을 쌓아서 물을 막기는 했지만 퍼내고 퍼내도 물이 줄지를 않았다. 한참을 물을 퍼내고 나니 바닥이 보이고 잠시 후 물고기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났다. 송사리, 중태기, 피라미 등이었다. 도랑 중간으로 모인 물고기들을 양동이에 담았다. 나도 잽싸게 달려들어 물고기를 양손으로 집었다. 고기를 잡아서 들뜨긴 했으나 물을 퍼내신 아버지는 숨이 찬 듯 보였다. 물고기 한 냄비를 아버지의 에너지와 맞바꾼 시간. 물고기 배를 따고 비늘을 긁어내야 했는데 호기심이 넘쳤던 나는 비린내가 난다는 아버지 만류에도 물고기 배를 따고, 내장을 바르고 비늘을 벗겼다.


어릴 땐, 겁이 없고 호기심만 넘쳤던 나는 엄마도 무섭다고 옆에 오지 않는 일을 잘도 해냈다. 아버지는 어린애들은 그런 것 보면 안 좋다고 하셨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재미있었다. 손질한 물고기를 자글자글 지져서 맛있게 먹었음은 물론이다. 아버지는 물고기 가시가 목에 걸리면 큰일 난다면서 가시를 발라주셨다. 그러고 보니 고등어나 갈치를 먹을 때도 가시를 자주 발라주시긴 했다. 난 흡족함을 느끼면서 맛있게 먹었다.


마을 앞 도랑은 폭이 2m 남짓 될까 말까 했다.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냇가였다. 깊은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기에 수정처럼 맑았다. 앞 도랑은 빨래터를 만들어놔서 동네의 빨래터이자 아이들의 목욕탕 구실도 했다. 어린 아기가 있는 집에는 똥 기저귀를 가져와서 냇가에 흔들면 똥 덩어리가 물을 따라 둥둥 떠내려갔다. 그래도 물이 맑았다. 이따금 그 좁은 도랑에서 낚시하는 마을 오빠들도 있었다. 낚시하는 모습을 본 나는 또 아버지를 졸랐다. 갑자기 낚싯대를 만들어 달라고 우겼다. 아버지는 낚싯대는 사야 한다는데 버스라야 하루 딱 두 번 다니는 시골인데다 면 소재지에 나가도 낚싯대 구하기는 어려웠다.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하도 졸라대니 임시방편으로 대나무에 실을 달아서 낚싯바늘은 옷핀을 구부려서 만들어주셨다. 집 앞 거름더미에서 지렁이도 몇 마리 잡아주시면서 지렁이를 반만 끼우라고 하셨다. 그러면 고기가 문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도랑으로 따라와 지렁이를 바늘에 끼워 낚싯대를 먼저 드리우니 물고기들이 지렁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고기를 많이 잡으리라는 기대를 잔뜩 하고 낚싯대를 냇가에 드리웠다. 그러자마자 엄지손가락만 한 고기가 낚싯바늘을 물었다. 한 마리를 잡고 나니 신이 났다. 그렇게 몇 마리를 더 잡았다. 그런데 고기가 너무 작고 더 이상 고기들이 속지 않았다. 혹 물더라도 낚싯바늘이 시원찮았는지 물었다가 지렁이만 빼먹고 도망가 버렸다. 내 생애 실패로 끝난 첫 낚시. 오후 내내 낚싯대와 씨름하다가 고무신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 물으셨고 난 고기가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피라미 같은 거 잡아봐야 먹을 것도 없다고 하시며 가을에 미꾸라지를 잡자고 하셨다.


추수가 얼추 끝난 늦가을에 아버지가 언니와 나를 데리고 말랑뜰에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자고 하셨다. 역시 삽 한 자루와 양동이를 들고서였다. 논 한쪽에는 쑤⁎가 있어서 물이 쿨렁쿨렁 올라왔다. 쑤 주변은 진흙이고 너무 깊어 들어가면 빠져서 영영 그 쑤에 갇혀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우리는 조심해서 쑤 주위에 있었고 아버지가 삽으로 진흙을 걷어내자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장어만 한 미꾸라지가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하도 많아서 그냥 주워 담으면 될 정도였다. 진흙 반 미꾸라지 반이니 금새 한 양동이를 잡았다. 그것으로 튀김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가을 미꾸라지는 보약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우린 배가 불러서 질릴 때까지 미꾸라지 튀김을 먹었다. 나중에는 아버지 혼자 잡아 오셔서 우리는 맛있게 먹기만 했다.


먹을 게 워낙 귀한 시절이다 보니 아버지는 어떻게든 몸에 좋은 것을 거둬 먹이려고 하셨다. 겨울이면 꿩이나 참새를 잡아서 푹 고아 주시고, 황기라는 약재도 닭 삶을 때 같이 고아서는 국물까지 다 먹으라고 하셨다.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우리에게 어떻게든 먹이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가난해도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님 밑에 있을 때가 좋았다. 지금은 그때의 아버지 나이만큼 먹어서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벼그루터기만 남은 논을 보면 쑤에 빠져가면서 미꾸라지를 잡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연하다. 많이 먹으라고 권하시던 목소리도 아직 귓가에 쟁쟁하다.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옛 추억들은, 혹시라도 잊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모른다. 영사기가 필름을 돌리듯 난 거꾸로 과거로의 필름을 되감기하고 있다.


⁎쑤: 늪의 경북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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