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먹고 사는 것만 우선으로 여겼던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여흥이 있는 분이셨다. 입에 넣을 양식도 부족하던 때, 우리 집에는 기타 한 대가 버젓이 있었다. 나중에는 엄마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렸지만 내겐 부분적으로 단편의 기억이 떠오르고는 한다. 아버지는 평소에 노래를 달고 사셨다. 그랬기에 우리도 늘 음악과 함께할 수 있었다. 가난한 형편에도 라디오가 한 대 있어 뉴스를 듣기도 하고, 흘러나오는 가요를 들으면서 나도 라디오 속의 가수가 되고 싶은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다.
아버지는 산간 시골에서 나셨지만 아마 약간의 연예 기질을 타고나셨던가 보다. 검은 피부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늘 싱글벙글하셨다. 잘 웃으시고 또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하셨다. 엄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면 열이면 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였다. 매번 똑같은 이야기는 어린 나를 꽤 지루하게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하도 들어서 지겨우니 레퍼토리를 바꿔 달라고 엄마에게 자주 보챘다.
아버지는 한낮의 무더위에는 자식들을 데리고 이웃 윤 씨네 감나무 그늘에 자리를 펴고 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셨다. 우리 세 자매는 신이 나 손뼉 치며 아버지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한 편의 그림이요, 진정한 평화로움인데 주관적 관점에 따라 누군가에겐 보기 싫고 볼썽사납게 비칠 수 있었으리라. 식구들 양식 걱정하는 엄마에겐 그 모습이 한심스러웠는지 엄마의 아버지를 향한 잔소리는 그칠 새가 없었다.
음력으로 오뉴월 땡볕에서 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내 땅 한 평 없이 남의 땅을 도조 얻어 근근이 살아가는 살림인지라, 엄마는 당신 생각만큼 움직여주지 않는 아버지를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겼다. 부부싸움 후 화풀이로 엄마는 기타를 부숴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살 엄두는 못 내고 대신 오래된 하모니카를 꺼내셨다. 겨울밤, 저녁을 먹고 나면 길어진 밤을 아버지는 군대 이야기와 키우던 사냥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러다 흥에 겨우시면 하모니카를 바이브레이션까지 넣어 아주 멋들어지게 부셨다. 뿜뿜뿜-하모니카 연주할 때면 흥에 들뜬 아이처럼 혹은 악사처럼 무아지경의 순간. 그 시각, 우리가 둘러앉은 방은 아버지 혼자만의 독무대였다. 아버지는 이미 화려한 스테이지 위의 스타이고, 둘러앉은 우린 열렬한 팬이었다. 마치 신들린 무당이 굿하듯 하모니카 불기는 계속되었고, 그 소리는 저 깊은 뒷골까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무안을 당하시고도 하모니카 불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나도 아버지처럼 불고 싶었지만 아버지처럼 불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모니카는 낡고 소리도 이상해졌다. 아버지는 새 하모니카를 갖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새 하모니카는 우리 집 형편에 언감생심이었다. 언젠가는 아버지께 새 하모니카를 선물해드리고 싶었다.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내가 번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남들이 그렇게 하듯 빨간 내의도 마련해드렸다. 그토록 갖고 싶어 하시던 하모니카를 매장에서 진열된 것 중 가장 비싼 것으로 골랐다. 아버지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같이 연신 싱글벙글하셨다. 급기야 울먹울먹하셨고 자식인 내게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시며 평생 고이 간직하겠노라고 다짐하셨다. 그깟 하모니카 얼마나 한다고 갖고 싶은 것 하나 못 사셨나 싶어 나는 속이 젖어왔다. 땡볕에서 일만 하신 아버지를 이제라도 기쁘게 해드리니 내 마음도 훈훈했다.
모두가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와 가족을 지탱해줬던 것은 웃음과 음악이 아닌가 한다. 노래를 듣고 자라는 자식들이 당연히 노래를 따라불렀고 온 가족이 합창하듯 노래를 즐겼다. 모를 심을 때도, 나락을 벨 때도, 소죽을 끓일 때도, 개털을 빗겨줄 때도 아버지는 노래와 함께였다. 돈 때문에 부부싸움을 그토록 하고, 위암이 걸렸을 때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은 게 한으로 남았지만 노래가 있었기에 아버지는 즐거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하모니카는 쓸모가 없어졌다. 가보처럼 간직하던 악기이니 보관할까 고민하다 아버지와 함께 보내주기로 의견이 모였다. 주인을 잃은 하모니카는 발인 날 아버지의 생전에 입으시던 옷가지, 신발과 함께 태워졌다. 이생에서 힘들고 고달프기만 했던 아버지의 일생도 저 불길 속으로 활활 타들었다. 불길은 높이, 높이 마천루도 태워버릴 기세로 치솟았다. 그 광경을 본 순간 내 목구멍을 타고 뭔가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확 치고 올라왔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의 정겨운 하모니카 소리가 뒷산을 넘어가는 노을처럼 붉게 붉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