뎅그마니 거실장 한쪽에서 나를 바라본다. 동그랗고 앙증맞은 놋주발,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의 유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따로 챙겨온 것이 아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유년시절 쓰시던 놋그릇을 잘 닦아서 내 밥공기로 쓰라는 말씀에 피식 웃었다. 요즘 누가 놋그릇을 쓰냐는 내 말에 놋이 사람한테 좋으니까 잘 간직하라고 하셨다. 놋이라는 물질은 구리와 아연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요즘에는 놋그릇 구경하기가 힘들지만 예전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집집마다 놋그릇이 많았다.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오면 아낙들은 마당에 퍼질러 앉아 오로지 마른 짚에 흙을 묻혀 팔목이 저리도록 힘주어 닦았다. 그렇게 닦여진 것을 물에 헹구면 검푸른 빛의 녹은 언제 슬었냐는 듯, 노오란 광채를 내뿜고 금덩이처럼 빛이 났다. 그때 나는, 하필이면 흙을 묻혀 닦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불결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그것이 밥상에 올라가는 것이 거북하고 찜찜했다. 그래서인지 놋그릇에는 놋 특유의 비린내라고 할까 난 그렇게 느꼈다. 그 냄새가 싫었다. 큰엄마들과 엄마의 놋그릇 닦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비상식적이고 불결하게만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밥상은 옻칠을 한 직사각 교자상에 밥그릇, 국그릇, 반찬 담는 종지, 수저까지 일절 놋으로 된 것이었다. 당시는 스테인레스 스틸이 보급되어 집집마다 일명 ‘스덴’을 많이 사용했다. 깨지지도 녹슬지도 않고 단단한 그 금속은 나중에 제기까지 그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스테인레스 스틸이 좀 가벼운 편인데 비해 놋은 많이 무거웠다. 두께가 두껍고 열전도율이 높아서 데워진 밥이 금방 식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용하면 주기적으로 닦아줘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렇지 않으면 시퍼런 녹이 슬어 아주 보기가 흉했기에 예전 우리 어머니 세대는 그 그릇을 닦는 일을 신성시했다. 모든 것이 직접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니 한가하게 낮잠이나 즐기고 할 여유가 없이 집안일이라는 것이 끝이 없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쓰시던 놋주발은 비록 검푸르게 녹이 슬었지만 그 모양새가 아주 귀여웠다. 어린 아이가 쓰는 용도에 맞게 작고 아담하면서 단단했다. 그 모양새는 아버지 유년시절의 모습 같았다. 아버지도 나처럼 마냥 귀엽고 철없던 시절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에 그것을 가지고 올 때는 윤이 나게 반짝반짝 닦아서 가보처럼 보관하리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닦여지지 않았다.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도 보고 치약으로 닦아보기도 했지만 짙은 그림자처럼 스며든 얼룩은 제거가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그릇을 그냥 거실장에 넣어두었다. 짚을 구해 와서 예전 어머니들이 하시던 방법으로 닦아보자고 마음먹었지만 닦아야지 생각만 하며 차일피일 미뤄두었다. 어떻게 하면 깨끗이 놋 특유의 특성을 살릴 수 있을까 방법을 고민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면 그 놋그릇 잘 닦아뒀냐고 물으시는데 어물쩍 얼버무려야 했다. 그리곤 놋주발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어느 날, 동창밴드에 놋그릇에 대해 올려 진 글을 보고 부랴부랴 찾아보았다. 혹시 이사하면서 모르고 버려진 것은 아닌지 애가 탔다. 퇴근 후 잊지 않고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니 다행스럽게도 거기에 소리 없이 있었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께 많이 죄송했다. 아버지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물건을 선뜻 내어주셨는데 너무 무관심하게 방치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거실장 서랍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그릇은 꼭 아버지를 홀대한 것만 같아 가슴 한쪽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만약 아버지가 아신다면 얼마나 서운하실까. 검게 얼룩진 그 놋그릇이 아버지의 심정인 것만 같아 허겁지겁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도 역시 거친 줄만 그어질 뿐 말끔해지지 않았다.
광을 내는 것은 고사하고 얼룩이라도 매끔하게 지우고 싶었다. 도저히 닦아도 나아지지 않아 마트에 가서 3M수세미를 샀다. 전에 스테인레스 냄비의 얼룩이 그 수세미로 닦으니 가장 잘 닦인 기억이 있어서였다. 그 수세미에 세재대신 치약을 묻혀 진짜 있는 힘껏 닦기 시작했다. 마치 엄한 시아버지를 모시는 며느리의 심정으로 그 놋그릇에 광을 내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닦고 또 닦았다. 한참을 닦고 나니 예전 어머니들이 짚으로 닦은 것만은 못해도 아주 검은 얼룩은 제거되고 놋 특유의 색깔이 약간은 살아났다.
난 드디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온힘을 쥐어짜 닦아서인지 팔이 덜덜 떨렸지만 상관없었다. 아버지에게 약간의 체면치레는 한 셈이었다. 윤기를 낸 놋그릇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얼핏 보면 동그란 원 모양 같지만 완전히 대칭이 되지 않은 게 보였다. 아버지가 1937년생이시니 분명히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될 시기가 아닐 때이니만큼 어느 유기장에서 두드려 만든 방짜유기가 분명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일화로는 유년시절 갑부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자였던 집이었고 아버지는 당시 귀하디귀한 하얀 쌀밥이 담긴 밥공기를 내동댕이칠 만큼 포시랍게 자랐다고 한다.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을 치룬 뒤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아버지의 삶은, 천덕꾸러기에 고달픈 삶으로 전락을 해버렸다.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진 삶은 반전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그럴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예전의 잘 살던 때를 좀처럼 말씀하지 않으셨다. 집안 어른들에게 엄마가 전해들은 얘기를 거쳐서 전해 들었을 뿐이다.
놋그릇 속의 빈 공간은 마치 아버지의 인생이 들어있는 듯 느껴졌다. 그 속에 미처 풀어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그릇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살짝 품에 안아봤다. 엄마 잃은 어린 소년이 안겨진 것만 같았다. 다시는 널 어두운 곳에 혼자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거실장 위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놓아두었다. 매일매일 봐주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역시 공염불이었다. 아침이면 씻고 허겁지겁 출근하기 바빴고, 저녁이면 옷 갈이입고 밥하기 바빴다. 난 역시 완전한 사랑에는 미흡한 유형의 인간인가 보다.
올케가 시집오면서 혼수로 방짜유기세트를 해왔다. 친정엄마와 돌아가신 아버지의 것도 함께였다. 요즘은 놋 제품이 보온, 보냉 효과가 탁월하며 중금속이 녹아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새로이 각광받고 있다. 물론 유기장에서 만든 방짜유기는 아주 고가로 쉽게 구입하기 힘들 정도로 귀하신 몸이 되었다. 광택도 뛰어나고 디자인까지 세련된 고급스러운 그 놋그릇들을 보니 뿌듯함보다 아쉬움이 컸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을 사용할 임자가 없다는 것은 슬픈 노릇이다.
결국 아버지 몫의 놋그릇은 제사상으로 올려졌다. 그렇게 제사상이라도 좋은 그릇에 담아 모시는 것이 하지 않는 것 보다 낫겠지만, 이 좋은 세상을 한 번도 맞이하지 못하신 것이 가슴 저밀 뿐이다. 뒷산 중턱,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드신 아버진 과연 알고나 계실까? 정성스레 놋주발에 제삿밥을 담았다. 탕국과 나란히 놓은 후, 옆에 놋수저도 놓아드렸다. 얼굴 한 번 선보이지 못한 올케가 옆에서 수줍게 웃는다.
“아버지, 며느리가 해온 놋그릇에 차렸어요. 좋으시죠?”
가무잡잡한 얼굴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웃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 2016 동서문학상 맥심상 수상작(저작권이 작가에게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