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무신과 수제비

by 글마루

고무신과 수제비고무신과 수제비

냉장해 둔 밀가루 반죽이 고무줄처럼 차지다. 멸치, 다시마, 무, 파, 청양고추를 넣고 우린 육수에 탄력이 생긴 반죽을 얄팍얄팍하게 펴서 던져 넣으면 잠시 후 다 익은 수제비가 솥 위로 몽글몽글 떠 오른다. 거기에다 얼큰하게 만든 양념장을 끼얹어서 먹으면, 매워서 눈물 흘리고 뜨거워서 땀을 뻘뻘 흘리는데도 시원하다. 나는 그것이 바로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며 얼굴을 대접에 파묻는다. 한편 수제비만 먹으면 엄마의 때가 꼬질꼬질한 고무신이 의식의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뒤따라온다.



아버지는 논둑의 풀을 깎고 오셨다. 후드득후드득 이마에서는 연신 땀방울을 쏟으며 배가 고프다고 재촉하셨다. 엄마는 뭐를 할지 물었고 아버지는 수제비가 드시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원체 면 종류를 좋아하기도 했고 쌀이 귀할 때였다. 그때는 여름이 오기 전에 쌀이 떨어졌기에 여름날에 점심은 거의 손칼국수나 수제비를 끓였다. 한여름인데도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을 달궜다. 멸치도 귀할 때라 그저 맹물을 붓고 밀가루를 좀 붉게 반죽해서 감자나 호박을 넣어서 끓였다. 이따금 호박잎을 치대어 넣기도 했는데 호박잎의 거칠면서도 설겅설겅 씹히는 식감이 입맛을 돋웠다.


나는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때고 엄마와 언니는 부뚜막 양쪽에서 숟가락으로 수제비를 떠 넣고 있었다. 빨리 내오라는 아버지 성화에 모두 마음이 바빠졌다. 엄마와 언니는 숟가락으로 바가지를 벅벅 긁으며 불 옆에서 열심히 수제비를 떠 넣었다. 수제비를 거의 다 떠 넣을 무렵이었다. 다 됐다 하는 순간 엄마 발에 불똥이 튀었는지 엄마가 “앗 뜨거워” 하며 발을 채트렸다. 그 순간 낡아서 누렇게 된 엄마의 코고무신이 쑥 날아서는 솥으로 직행했다.


솥에는 벌써 수제비가 팔팔 끓고 있었다. 일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졌기에 미처 손쓸 사이가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꺼냈으면 나았는데 엄마가 “에구머니, 어쩌나……” 망설이는 순간 고무신과 수제비가 한 솥에서 끓여졌다. 잠시 후 건져내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부엌에 있던 세 사람은 버리고 다시 끓일지 그냥 내갈지 눈빛을 주고받았다. 결국 엄마가 아버지께 아무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으로 수제비는 마무리되었다.


다시 끓이기에는 배고프시다는 아버지의 성화가 이어졌고, 비위가 약했던 나는 엄마에게 안 먹는다고 선언했다. 엄마는 내가 안 먹으면 아버지가 이유를 물을 것이고, 고무신이 들어간 것을 아버지가 아시면 수제비도 다시 끓여야 되고 잔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밥상머리에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한술 뜨기조차 역겨웠지만 눈치를 봐가며 먹는 척했다. 아무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와 동생들은 수제비를 단숨에 비워냈고, 난 숟가락질하는 흉내만 냈다. 혹시 고무신에 묻은 흙이 씹혀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사실을 이실직고하는 것이 옳은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갈팡질팡 어수선했다.


숟가락질이 시원찮은 내게 아버지는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난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워낙 정직을 가훈으로 여기시는 아버지와 그 성격을 꼭 빼닮은 나였지만 중학생이라 ‘선의의 거짓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의 그런 성격을 잘 아는 엄마는 수제비를 먹는 내내 내게 모른 척하라는 눈짓을 보냈고 결국 나는 엄마, 언니와 공범이 되었다. 아버지께는 죄송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수제비를 먹으려고 하면 솥에 빠진 엄마의 고무신이 떠오르며 고무 녹은 냄새가 나는 듯했다.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비위가 약했던 나. 그 생각은 몇 년 동안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아버지가 없을 때면 엄마에게 수제비 얘기를 했다. 어떻게 고무신이 빠진 수제비를 먹으라고 주느냐는 말이었다. 난 진지했지만 엄마와 언니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결국 나도 따라 웃었고 웃음보가 터졌는지 깔깔거림이 멈춰지지 않았다. 너무 웃어서인지 배가 땅기고 눈물이 스밀 지경이었다. 엄마는 그 얘기는 다시는 하지 말라고 내게 신신당부했다.


엄마의 고무신은 밭에도 가고, 재래식 변소에도 가고, 오일장에도 다니는 단 한 켤레의 신발이었다. 그 고무신에는 흙이 묻어있었다. 그게 솥 안으로 잠수했으니 한편 우스꽝스럽고 한편 비위가 상했다. 어쨌든 수제비 사건은 표면에 떠오르지 않고 조용히 묻히었다. 이따금 아버지를 볼 때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가엾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때, 수제비만큼은 푸짐했다. 수제비는 물속에서 끓이면 몸집이 배로 커지며 떠오른다. 밀가루 덩어리가 어찌 그리도 구수하든지. 신물이 넘어오도록 먹어댔다. 숟가락으로 대충 긁어 넣어 커진 덩어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또 먹었다. 배가 부르니 마음은 부자가 된 듯 흡족했다. 육수를 내지 않아도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수제비. 수제비로 포식을 한 우리는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서 땀을 식혔다. 사위가 깜깜해진 마당에는 대숲에서 불어주는 한 줄기 바람이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우리는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이름을 맞혔다. 국자처럼 생긴 모양은 북두칠성이라며 눈으로 좇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별을 더듬었다.


마당에는 모기를 쫓기 위해 모깃불이 피워졌고 불씨 속에 감자를 몇 알 던져 넣으면 감자가 구워졌다. 나무작대기로 구운 감자를 꺼내면 어떤 것은 바짝 타서 숯검정이 되었고 어떤 것은 마침맞게 구워졌다.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면 혓바닥이 탈 만큼 뜨거웠지만 달콤하고 촉촉한 것이 사르르 녹았다.


깜깜한 하늘에는 별들이 더 들어차 제빛을 뽐냈고 나는 인기 있는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행성이 어디쯤 있을지 손가락으로 짚어보며 가늠하기도 했다. 주인공인 철이와 메텔이 탄 기차가 별과 별 사이를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또 노란빛을 뿜으며 구름을 건너는 달을 보며 저 달 어디쯤 계수나무 아래에서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을지도 모를 거라며 세 자매는 입을 모았다. 아버지는 모깃불을 도닥거렸고 엄마는 모기에 뜯길까 봐 우리가 누워있는 자리에 연신 부채질을 했다.


수제비를 먹는 내내 수십 년도 더 된 일이 어제의 일인 양 생생하다. 수제비와 고무신은 생뚱맞게도 옛 기억을 동시에 소환한다. 가난과 동무 삼은 집에는 고무신이 찢어져 너덜너덜해도 새 고무신을 바로 사지 못했다. 때에 찌들고 낡아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 장에 가는 엄마가 부끄러워 타박하기도 했던 나. 여름에는 땀에 미끄덩거려 걷다가도 홱 돌아가거나 벗겨지는 고무신. 지겹도록 먹은 수제비, 지겹도록 신어야만 했던 고무신은 가난으로 점철된 한 가족의 저민 가슴 끝에 또 다른 그리움으로 아른거린다.

keyword
이전 14화물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