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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송

by 글마루

숨이 턱 막히도록 더운 여름에는 푸른 숲만 봐도 시원해진다. 여름뿐 아니라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나무는 소나뭇과다. 초록이 품는 싱그러움은 비단 시각적인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솔 향기 그윽한 숲에 있으면 온몸과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산에는 온통 나무가 빽빽이 솟아있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채 나무들끼리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 있는 모습은 정겹기조차 하다. 특히 낙엽송 우거진 숲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이가 있으니 바로 아버지다.


고향에는 동산의 한쪽에 곧고 기다란 나무가 많았다. 잎이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그 나무는 잎이 소나무처럼 가늘고 뾰족했다. 성장이 무척 빨라서 해가 바뀔 때마다 내 키의 몇 배나 자라있었다. 동산 옆에는 길쭉한 밭이 있었는데 우리 소유는 아니고 큰아버지 명의로 된 것을 마늘이나, 콩, 깨 등을 심어서 가용으로 먹고 썼다.


우리는 여름방학만 되면 동산밭으로 김을 매러 다녔다. 푹푹 찌는 염천 더위에 콩밭을 매노라면 쪼그리고 앉은 오금이 땀으로 미끄덩거렸다. 밭고랑에서는 뜨겁고 습한 열기가 땅 위로 훅훅 뿜어져 올라왔다. 밭고랑은 얼마나 긴지 끝을 바라보기만 해도 김맬 생각에 눈앞이 노래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훌쩍 자란 낙엽송이 그늘이 되어준다는 것이었다. 키만 위로 자라고 잎도 가늘지만, 타는 듯한 땡볕을 그럭저럭 가려주었다.


땡볕을 가려주는 낙엽송은 너무 무성하면 작물이 햇빛을 받지 못해 여무는 데 지장을 줬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잔가지를 정리했다. 곧게 뻗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가지를 쳐줘야 했는데 나무 밑동은 매끈했는데 거길 타고 올라가는 아버지가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 작업은 매해 계속되었다. 쳐낸 줄기들은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생가지를 쳤기에 마르지 않은 낙엽송은 무겁고 연기만 매캐해 잘 타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그 나뭇가지를 별로 반기지 않으셨다. 가을이 되면 낙엽송의 마른 잎들은 누렇게 변해가서 늦가을에는 땅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것을 긁어모아 불쏘시개로 쓰면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나라 소나무와는 다르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쳐다봐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는 해마다 커갔다.


이 나무의 근처에는 배추를 심으면 곤란하다. 가을이 되면서 떨어지는 잎이 배추 사이사이에 끼어서 배추를 절이고 씻을 때 낙엽송 이파리가 둥둥 떠다녔다. 한두 포기도 아니고 백 포기 넘는 양의 김장을 해야 하기에 바늘처럼 까슬한 잎을 속속들이 골라내는 것은 배추를 절이는 작업보다 손이 많이 갔다. 아무리 자연에서 발생하는 나뭇잎이라도 배추와 버무릴 수는 없을 터. 그렇지만 배추는 그 밭에서 제법 달게 여물어갔다.


동산은 잔디가 빽빽하고 언덕처럼 경사가 급하지 않기에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거기서 우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를 주로 했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일반 묘보다 몇 배 큰 귀족의 무덤처럼 웅장한 묘가 하나씩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시작점을 그 묘의 꼭대기에서 했다. 전부터 놀이를 해와서인지 우린 아무렇지 않게 일과처럼 무덤에서 뛰어놀았다. 그 큰 봉분만큼이나 동네 사람들은 묘 속에 무슨 보물이 들어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무덤 옆으로 사열하듯 늘어선 낙엽송은 무덤들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았다.


동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동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보며 그 옆의 낙엽송은 말없이 쑥쑥 자랐다. 몇 년이 지나자 낙엽송은 둘레가 아이 한 아름만 하고, 우듬지는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다. 동화 「잭과 콩나무」에서 콩나무가 치솟듯 우듬지가 하늘을 뚫고 올라갈 기세였다. 그와 더불어 잎은 더욱 무성해졌다. 그만큼 가지를 쳐야 하는 아버지의 일은 늘어났고, 더 높이 올라야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서만 그쳐도 괜찮은데 농사를 짓기 위해 가지치기하는 것을 동산 주인인 의붓할머니나 큰집에서는 혹시 나무를 상하게 할까 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속상하게 한 적이 있었다.


원래 동산은 할아버지 명의였지만 예전 군청에 다니시던 큰아버지가 본인 앞으로 명의를 이전했다는 것이다. 땅 한 평 물려받지 못하고 소작농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아버지에겐 속상한 일이긴 했다. 우리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철이 없는 자식들은 아버지는 뭐 했냐고 아버지 속을 긁었다. 일찍 뭐라도 땅 한 뙈기 차지했으면 이렇게 가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투덜거렸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논 두 다락과 밭 한 뙈기를 겨우 장만했다. 대출을 받고 개인 빚을 내 무리를 했으나 엄연히 당신 소유의 땅이 생긴 것이다. 한평생 소작만 하셨던 터라 말 못 할 한이 컸던 만큼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야 소작농에서 자작농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몇 년을 더 일구시다가 그 밭에서 손을 뗀 지도 오래되었다. 이젠 동네 아이들도 사라지고 인적조차 끊긴 동산에는 덩치 큰 낙엽송만이 우두커니 지키고 섰다.


나무는 꼭 무뚝뚝한 아저씨 같았다. 언제나 말이 없었다. 무표정인 채로 약간은 어둡기도 하고 뭔가 그늘져 보였다. 어린 내게 가난은 컴컴한 굴속에 웅크리는 것처럼 상징되었다. 낙엽송 늘어진 밑에 낫 한 자루 들고 계신 아버지가 환영처럼 다가온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버석한 이파리만큼이나 말라 있었다. 나무의 그늘만큼이나 음지에만 사셨고, 가늘고 뾰족한 잎처럼 위태롭게 사셨던 아버지도 어느덧 나무 곁에 묻히셨다.


낙엽송 우거진 숲을 거닐어 본다. 떨어진 솔잎이 쌓이고 쌓여 푹신함을 선사하는 카펫 길은 느리게 걸으면 더 운치 있다. 누군가에겐 휴식을 주는 낙엽송 숲이 누군가에겐 늘어나는 일거리로 어깨를 짓누를 수도 있다는 것은 삶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와 만나게 된다면 소작농의 짐은 벗어놓고 솔 향기 그윽한 이 길을 손잡고 거닐고 싶다. 벌써 귓전에는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 사진 출처: 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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