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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약속

by 글마루

예닐곱의 내게 아버지는 질문하셨다. 꿈이 뭐냐는 물음에 나는 ‘선생님’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아버지는 기특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곧이어 아버지는 내게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분명히 선생님이 될 거라며 나중에 내가 성장해서 선생님이 되어 집에 찾아온다면 무척 기쁠 거라는 말씀을 하셨다. 무언가 확신에 찬 상상을 하는 듯했고 집안 형편을 모르는 나는 가능하리라 믿었다. 어쩌면 꿈같기만 한 희망을 잠시 품었었다.


어린아이가 좋은 것은 천진난만하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땅 한 평 자가로 소유하지 못한 부모님이지만 자식들에게 정성을 다하셨기에 우리 집이 가난한 걸 몰랐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었고 아버지로부터 무한 사랑을 받은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다가 초등 5학년 무렵 철이 들고 눈치가 생기면서 우리 집이 지독히 가난하다는 걸 알았다. 몰랐으면 좋았을 걸 그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보다 집안을 어떻게 해야 일으킬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부는 뒷전이고 집안일 농사일 돕느라 소녀 가장이 되어갔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진학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으로 부모님 눈치를 봤다. 게다가 엄마는 내가 중·고등학생이던 내내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는 날이 많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불 때서 밥을 짓고 동생들 도시락 싸놓고 학교에 가고 저녁에도 식구들 밥을 하고 주말이면 엄마 대신 농사 일을 하느라 입술이 부풀어 오른 적이 많았다. 힘겨움에 가출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난 그럴 용기도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해 돈 벌어 고향 집에 보태주고 동생들 용돈 챙기느라 정작 나 자신에게는 최대한 절약하고 아꼈다. 워낙 비빌 언덕 없는 가난은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이었고 지친 나는 도피처로 결혼했다. 그 역시 그리 행복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일하느라 휴일도 없이 살아야 했다. 삶의 힘겨움에 부딪히고 과로로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쓰러지지 않았기에 견뎌왔던 것 같다.


그러다 지금까지의 삶에 ‘나’라는 주어가 빠진 것을 알았고 그 옛날 공부를 하고 싶은 막연한 꿈을 이루기 위해 마흔셋에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다.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바쁜 나날이었지만 배움이 주는 희열이 너무나 커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졸업했다. 졸업하고 보니 그 옛날 아버지와 한 약속이 떠올라 선생님이 되고 싶어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강사로 근무했다. 강사임에도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는 게 무척 행복했다.


내 나이 쉰에 교사가 되고 싶어 교육대학원을 진학했다. 늦깎이 공부도 힘든데 일하면서 공부하는 건 남보다 더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주말에 나들이 한번 가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히고 새벽까지 공부한 결과 쉰셋에 교원자격증을 취득했다. 하나하나의 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큰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처럼 버거웠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비록 기간제지만 교직에 몸담을 수 있었다.


교생실습을 갔을 때 부장 선생님이 남들은 힘들어서 이제 명예퇴직하는 나이에 새로 시작하는 선생님이 대단하다고 말씀하셨고 학생들도 내게 꼭 교사가 되라는 응원의 편지를 써줬다.


교생실습이 가장 큰 관문이라 생각했는데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는 관문은 무척 많았다. 특히 학위 논문을 쓸 때는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직장에서 근무가 끝나고 집에 와 책상에 앉으면 새벽 1~2시까지 뻑뻑한 눈을 비벼가며 논문 쓰기에 매달렸고 기껏 쓴 논문을 지도교수님이 다시 써야 한다고 하실 때는 낭패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포기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껏 공부한 게 아까워 이미 쓴 것은 버리고 다시 주제를 정하고 수백 번은 고쳐 썼다. 일 년 넘게 걸려 논문을 통과하고 석사 학위증과 교원자격증을 취득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졸업만 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는데 막상 졸업하니 두려움이 더 크게 몰려왔다. 그러다 갑자기 기간제 교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경상북도교육청 인력풀에 기간제 교사 등록을 하고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던 차였다. 채용 기간이 한 달이라 부담은 적었으나 고등학교인지라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해온 공부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나는 어떤 시도든 해야 했다. 교감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간단하게 면접을 본 후 채용이 결정되었다. 어쩌면 무모하기만 한 도전이지만 나는 출근하는 전날 선생님이 된다는 설렘과 수업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겹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휴직하는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 수술하게 되었고 미리 진도를 나갔기에 중간고사 전에는 자습하면 된다며 나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교과서를 받고 집에 와서 읽어봐도 읽은 작품보다는 읽지 않는 작품이 더 많았다. 전공이 문학인지라 쉽게 하리라 예상했던 수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을 해야 하는데 준비가 덜 된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은 벌써 수능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과 수능은 실제로 거리감이 있었다. 활동 위주의 수업방식을 지향하는 교육 방향과는 달리 현실은 수능이라는 장벽이 기다리고 있기에 학생들이나 학교에서 수능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교과서를 보고 수능 문제를 풀어봤다. 그렇지만 모두 다 맞히지는 못했다. 문득 불안감과 회의감이 나를 엄습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이제 시작인데 어떻게 10~20년 교직에 몸담은 선생님과 같을 수 있겠냐며 부족한 대로 해 보라고 했다. 이만큼도 무척 대견하고 장하다는 응원과 함께.


고등학교가 부담스러워 중학교에 가려고 해도 국어 기간제 교사를 채용하는 학교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 용기를 낸 것이다. 친구는 학생들에게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걸어온 과정도 본보기가 되고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했고 그 격려의 말에 힘을 얻었다. 만약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분명히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응원하시리라. 아버지를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내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교사 생활을 담임까지 맡게 되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착했고 특별한 문제 없이 잘 따라주었다. 중간고사 시험 때는 시험 감독을 하는데 시험을 치는 학생보다 내가 더 긴장되었다. 자칫 실수해서 학교나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조바심이 일어 정신을 바짝 차리며 감독에 임했고 다행히 실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계약기간이 종료되고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의 소개로 먼 거리에 있는 여고에 시간강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편도 70km가 넘는 거리인지라 교통비도 많이 들었고 얼마 안 되는 강사료로는 생활하기도 부족했으나 학생들과 수업하는 것만으로 가슴 벅찼다.


출근하면서 바라보는 태양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고, 퇴근할 무렵 물드는 붉은 노을은 나를 위해 연출하는 것 같았다. 경력은 부족해도 내 열정이 느껴졌는지 학생들은 내가 문학에 진심인 것 같다는 말을 해줬다. 실제로 국어 성적이 많이 올라갔다며 선생님 덕분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교사로서 자부심이 생겼다. 마지막 수업에는 함께 사진 찍고 정성을 들여 응원의 손 편지를 써줬다.


이십 년 넘는 학습 공백을 극복하고 작은 꿈을 이뤘던 건 어릴 때 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신


“넌 꼭 될 거야.”


라는 말씀이 등댓불이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면 된다는 아버지 말씀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도 대충대충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는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는 것을 즐기며 그것을 성취했을 때의 희열감이 얼마나 큰지 안다.


남들 은퇴할 나이에 시작한 교직 생활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수업과 더불어 해내야 하는 행정업무로 숨이 가쁠 때도 있지만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이 일이 내겐, 내 평생에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오십 년 만에 지켰다. 기간제교사의 길 또한 녹록하지는 않지만 내 도전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저 하늘에서 한결같이 나를 응원해주실 아버지가 계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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