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설고 물선 전라도로 길을 연다. 깎아지른 산보다는 드넓은 평야가 가없이 펼쳐진 들을 지난다. 들녘에 붉은빛이 도는 황토가 생경하고도 따뜻하다. 낯선 땅으로의 발을 딛는다는 건 두려움보다 설렘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뒤따라온 차가 꽁무니 물 듯 우리 차 뒤에 선다. 잠시 후 중년 부인이 뒷좌석에서 내리고 조수석에서 노인 한 분이 엉거주춤하게 발을 딛는다. 여인이 다가가 노인을 부축한다. 노인의 등은 새우처럼 구부정하다. 걸음도 휘청휘청 한 발 떼는 게 위태롭고 불안하다. 기운이 다 쇠한 듯 노인의 어깨는 허수아비에 걸친 옷처럼 엉성하고 허섭하다.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알맹이와 진이 다 빠져버린 듯한 헛헛함이랄까. 젊을 때는 사나이로서 가장으로서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오로지하고자 했고, 동분서주하며 생활전선을 누볐으리라. 열심히 꿀을 모으고 자기 소임이 끝나면 생을 마감하는 일벌처럼 처절하게 살지 않았을까. 노구가 되어 되돌아본 젊은 날은 한편으로 아쉽고 한편으로 후련할 것이리라. 노인의 구부러진 등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소환된다.
살아생전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아버지의 삶도 일벌과 비슷하다. 쉬지 않고 꿀을 빨아 벌통을 채우고 제 역할에만 충실한 삶. 다슬기를 잡기 위해 사촌오빠 경운기를 타고 한밤중에 수봉계곡으로 떠난 부모님을 난 그게 나들이라고 여겼다. 그땐 자가용이 없었기에 경운기가 농가에서는 자가용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엔 그마저도 없었으니 남의 경운기에 얹혀 다슬기 잡으러 떠난 것이다. 등교 때문에 같이 가지 못한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돌아온 아버지를 덜덜 볶았다. 집요하리만치 투덜거리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냇가에 고기 잡으러 갈 것을 제안했고 나는 못 이기는 척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도구는 달랑 삽 한 자루와 온 가족이 세수하는 대야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먼저 삽으로 바닥의 흙을 떠 도랑의 위아래에 둑을 쌓았다. 그런 후 대야로 도랑 바닥을 긁어내어 물을 둑 밖으로 다 퍼내자 도랑 가장자리에서 물고기들이 튀밥처럼 튀어나왔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같은 작업을 되풀이했고 우리 가족은 그날 고춧가루 팍팍 넣어 끓인 칼칼한 물고기 조림으로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이후로도 나는 아버지와 고기를 잡는다든지 함께 무엇인가를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기에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었다.
엄마와 아버지가 자주 다투기도 했으나 엄마의 엄청난 오해가 낳은 말도 안 되는 사연을 듣고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툭하면 말을 화살처럼 쏘아대니 당황하신 아버지는 내 눈치를 보셨지만 일방적으로 엄마 편인 내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내게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셨고 그 따뜻함이 진심이었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더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너무나 늦게…….
아버지의 몸피가 시나브로 앙상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은 아버지를 나는 ‘대추방망이’라고 놀려대곤 했다. 아버지의 등은 언제나 든든하고 따뜻했다. 장난을 치다 오른쪽 어깨가 빠진 나를 업고 왕복 이십 리를 뛰다시피 했을 때도 나는 아버지의 포근한 등허리에 기대어 잠들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나를 업고 학교 근처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언제나 당신의 등을 내어 주던 아버지가 있었기에 마음 한편에 두려움이 없었던지 나는 늘 당당했다.
내소사 가는 길은 전나무가 길 양쪽으로 사열하듯 늘어서 햇빛을 가려줬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햇빛은 짱짱한데 전나무 그늘이 없었다면 발걸음이 축축 처지고 지루했을 것이다. 절의 역사가 상당히 깊은 내소사는 원래 명칭이 ‘대소래사’와 ‘소소래사’로 불렸으나 지금은 올 래(來), 소생할 소(蘇), 절 사(寺)를 쓴다. 이 절에 왔다 가면 모두 젊게 소생할지도 모르는 일. 절 마당에는 삼층석탑이 수호신처럼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정면에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단청이 보이지 않는다. 나뭇결 그대로의 질감을 살려서인지 소박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법당문은 연꽃 문양을 하나씩 깎아 만들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공을 들여 조각해 다듬은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입체감이 돋보이는 연꽃을 보니 정교함이 묻어나온다. 문 한 짝이 모두 연꽃들의 향연이라니 불가에서의 연꽃은 부처님의 상징이라고 한다. 과히 연꽃을 조각한 목공은 부처님께 지성을 드린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으리라. 마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갖은 공을 들였던 것처럼.
돌아오는 길에는 무성한 전나무 행렬 속에 뿌리째 뽑힌 나무가 누워있다. 전나무는 뿌리가 깊지 않아 심한 바람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운 나무 주변에는 새로운 전나무가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다. 사람처럼 나무도 늙으면 땅속에 눕고 싶었던가. 인간의 삶이나 나무의 삶 또한 다를 게 무언가. 스스로 생이 다하면 재가 되어 자연 속에 묻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순환 원리일지 모른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기에 열심히 살아남는다고 한다. 속물적인 것 같지만 목적이 있으니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것은 아닐까.
뽑혀 누운 전나무를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가물거린다. 단 한 번도 아버지 모시고 여행을 가지 못했다. 여행은 고사하고 맛있는 음식 한 번 사드리지 못했으니 후회는 자책으로, 자책은 죄스러움으로, 죄스러움은 회한으로 남는 것이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일했지만 무능해 보이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증오한 적이 있다. 부잣집에 태어났더라면 풍족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은 가난이라는 짐을 차녀인 내게 물려준 아버지를 원망하도록 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진창 속에서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것은 결혼이었다. 결혼으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해결될 줄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효를 저질렀다. 내가 괴로우니 말 한마디 따뜻하게 드리지 못했고 가끔 드리는 용돈으로 생색내면 그만이었다. 서운할 법도 하건만 쓰다 달다 아무 말씀 없던 아버지가 진정 바랐던 것은 자식의 행복 아니었을까. 내 손이 시릴 때 아버지는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 내 언 손을 녹여줬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느 자식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아마 저 할아버지쯤 되었으리라. 암이라는 놈이 당신의 몸을 침범했을 때 극심한 통증으로 앉아서 잠을 청해야 했던 시간. 아프다는 내색 한 번 못 하고 그 고통을 혼자 삭여야 했으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아버지도 할머니의 아들이었으니 할머니 품에 안기어 아프다고 울부짖으며 하소연하고 싶지 않았을까. 베개를 끌어안고 고개를 베갯속에 파묻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잔인한 형벌이었다. 그 굳건하던 아버지가 나무처럼 딱딱하게 미라가 되어버렸다.
자세가 구부정하고 걸음이 신통찮아도 단 한 번이라도 내게 돌아와 주신다면. 그리움에 비례해 회한만 깊어 간다. 그동안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기댈 곳이 없다는 허전함만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를 그리워한 것도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나의 기죽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개별 인격체로서의 아버지의 삶을 가까이 다가가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나를 치켜세워주고, 예쁘다고 하고, 기특하다고 칭찬해준 추억에만 매몰돼 채워지지 못한 결핍만 보충하려고 했다. 정작 아버지가 바라셨던 것은 물질적인 효도보다 당신 딸의 다정함이 아니었을까.
소생하는 절에 왔으니 할 수만 있다면 부처님의 영험함에 기대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절을 올리고 싶다. 내 간절한 마음을 부처님이 굽어살펴 젊은 아버지가 돌아와 준다면 함께 손잡고 이 한적한 길을 오래도록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