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된 운동화를 결국 버렸다. 빨랫비누에 솔로 박박 문질러 빨면 겉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비만 오면 바닥이 갈라졌는지 밑창에 물이 스며들더니 급기야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큰맘 먹고 장만한 브랜드 운동화라 아끼고 아껴 신었고 애지중지했다. 원체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특히 신발은 더했다.
오랜 세월을 내 발과 함께해온 신발인지라 버릴 때는 내 몸의 일부분을 버리는 것처럼 미련이 남았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내 몸과 함께했기에 내 혼이 묻어있는 느낌이었다. 쓰레기봉투에 묶어 버리는데 낡아빠진 운동화가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어릴 때 시골은 누구 집 할 것 없이 거의 고무신만 신었다. 어쩌다 큰맘 먹고 장날 아버지가 사다 주신 빨간색 운동화 한 켤레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운동화는 두 손가락을 넣어도 남을 만큼 컸고 또 짝짝이였다. 결국 다시 바꿔 와야 했다. 아직도 내겐 운동화가 귀하기만 하다. 초등 시절 내내 고무신이 두 발과 함께했다. 그땐 고무신도 다 떨어져야 새것으로 바꿀 수 있는 시대였다. 고무신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의 한 토막. 내가 대여섯 살쯤이었다.
석한이네가 이사 왔다. 쇠실 할머니 집 아래채에 셋방살이한다고 했다. 석한이 엄마는 점쟁이라고 했다. 점쟁이가 뭔지 몰라 엄마한테 여쭤보니 점을 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설명했어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엄마, 아버지, 형, 누나, 여동생까지 여섯 식구였다.
어느 날 굿판이 벌어졌다. 석한이 엄마는 소복 차림이었다. 북, 장구, 꽹과리가 울리고 동네가 제법 왁자지껄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린애들은 보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다.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궁금해 나는 몰래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숨어봤다.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분위기는 짐작이 갔다. 무엇을 비는 모습이었다. 악기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석한이 엄마는 무슨 주문 비슷한 것을 외우며 손바닥을 연신 비벼댔다.
엄마한테 그런 걸 왜 하는지 여쭤봤다. 그렇게 하면 잘 풀리고 좋다고 하셨다. 아픈 사람도 낫는다고 했다. 참 신기했다. 나도 소원을 빌어보고 싶었다. ‘서울’이라는 곳, 휘황찬란하고 사람도 많고 기차도 자동차도 있다고 했다. 어린 나는 서울에만 가면 성공하는 것으로 알았다. 서울 가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서울 가면 좋은 반찬에 예쁜 옷에 공주처럼 살 수 있겠지! 맨 날 반찬도 없이 간장에 밥 비벼 먹고, 귀한 계란찜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엄마, 아버지도 시골 사람이 아닌 서울 사람으로 바꾸고 싶었다. 서울 엄마, 아버지는 잘해 주리라 믿었다.
굿은 삼일 정도 했다. 사람들은 무슨 소린가를 하며 여전히 손바닥을 비벼댔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렇게 비는 건지……. 참 의아했다. 그게 다섯 살 아이의 눈에 비친 굿의 모습이었다.
“그 쓸데없이, 소용없어.”
아버지는 굿에 대해 믿지 않는 모습이셨다. 굿이 끝나고 석한이네는 곧 소작농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기 땅 한 평 없이 사는 살림이 오죽할까마는.
동네에는 며칠에 한 번 엿장수가 들어왔다. 손수레를 끌고 엿판을 얹은 채 가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엿장수가 왔음을 알렸다.
“고물 팔아요.”
외침만 들렸다. 아이들은 가위 소리만 들어도 엿장수가 왔음을 알아챘다. 그동안 모아놓은 비료 포대나 빈 병을 들고나와 엿과 바꿔 먹었다. 엿장수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비료 포대였다. 빈 병은 잘 받지 않았고 값도 싸게 쳐줬다. 애써 모아놓은 빈 병을 그냥 들고 돌아와야 하는 날도 있었다. 엿은 말 그대로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아이들은 엿치기하는 엿장수의 가위에 눈길을 집중시켰다. 아무것도 내올 게 없으면 마른침만 꿀꺽 삼켜야 했다. 한 가닥만 먹어봤으면, 엿장수 아저씨가 인정을 베풀어서 한 토막 맛이라도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석한이 여동생은 네댓 살밖에 안 되었다. 얼마나 엿을 먹고 싶었는지 아직 새것이나 다름없는 엄마 고무신으로 엿을 바꾸려고 했다. 그걸 단박에 알아차린 엿장수 아저씨가
“신던 고무신 가져오면 뭐 신고 다닐래?”
여동생은 거의 울상이었다. 고무신을 가져가라는 아저씨한테 엿으로 바꿔 달라고 생떼를 썼다. 석한이가 집에 가자고 해도 손수레 옆에서 떠나지 않고 버텼다. 보다 못한 아저씨는 안 되었던지 엿을 한 토막 떼어주셨다. 아이들은 엿장수 손수레를 벌 떼처럼 따라다녔다. 먹을 것이 귀하고 과자는 구경하기 힘들었으니 그런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었다.
석한이네는 온 식구가 농사일에 매달리고 열심히 일했지만 얼마 못 살고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원래 태어난 고향도 아니고 자기 집도 없고, 자기 땅도 없는 사람이 살기는 시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떠날 때는 손수레 한 대를 빌려서 세간을 실었다. 그 이후로 석한이네 소식을 잘 알 수 없었다. 어느 마을로 갔다고도 하고, 어느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고도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고무신짝을 들고 와서 엿과 바꿔 먹겠다는 여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중년 부인이 되었을 석한이 여동생은 그 일을 기억이나 할까? 연어처럼 고향으로의 회고에 잠긴다. 아마 봄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