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 사람들

떠나간 자의 자취

by 글마루

※어제는 몸이 안 좋아 하루 쉬었습니다. 이 글은 인물과 내용을 약간 각색해 쓴 글입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쓴 글이라 유치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올려봅니다.


버려진 천주교회에 사는 모자가 있었다. 우리랑은 먼 친척뻘이었다. 대전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육촌쯤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할머니를 대전 고모라고 불렀다. 교회는 시골에서는 드물게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었다. 우리 자매들은 그곳의 살림이 궁금해져서 몇 번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대전 할머니와 만복이 아저씨가 마을로 들어오기 전, 내가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저녁에 엄마 손을 잡고 예배 보는 시간에 교회에 갔다.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겨울이었다. 엄마는 동생을 업고 있었고 교회에는 사람이 많았다. 교회 바닥은 학교처럼 마루로 되어 있었다. 그 안은 난로를 피워서인지 훈훈했다. 아마 그때가 크리스마스 이브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가 내 손을 잡고 교회에 간 것은 그날 가면 선물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배는 끝나지 않았고 선물을 받을지도 알 수 없었다.


“엄마, 여기가 어디야?”

“교회니까 조용히 해!”

신부님의 설교가 이어졌고 난 조용히 해야 한다는 엄마의 당부에 물끄러미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기다리기 지친 엄마는 내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선물을 언제 줄지도 모르지만 속내와 달리 엄마가 선물 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비윗장이 좋지 못해 보였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내 눈에는 그곳의 분위기가 자못 엄숙하기도 하고 더 머무르고 싶은 욕구가 있었으나 엄마가 이끄는 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은 이미 저녁이 깊어져 캄캄했다. 눈은 계속 펑펑 내리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문득 무서움이 밀려왔다. 엄마 손을 잡고는 있었지만 겁이 많기는 엄마가 더했다. 그 칠흑 같은 어둠을 쌓인 눈이 밝혀주었고, 우린 눈 쌓인 신작로를 폭폭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눈을 발로 밟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그렇게 밟았을 때 소리가 나는 눈은 잘 뭉쳐진다. 그렇지 않은 눈은 많이 내려도 풀풀 날리기만 했다. 그래도 그냥 흩날리는 눈보다는 잘 다져지는 눈이 더 좋았다. 뭉쳐지지도 않고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기만 하는 눈은 안 그래도 추운 겨울을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눈은 아무리 어린 나였지만 왠지 포근하지 않았다. 그냥 서글펐다.


얼마 안 있어서 신자들이 줄어든 교회는 문을 닫았고 그 후 4H 청년들의 모임 장소로 쓰였다. 나는 어렸기에 4H에 대해서 이해를 못 했지만 4H 마크와 글자는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초록색에 네잎클로버 모형이었다. 거기에는 어른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모였었다. 뭘 토론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네들끼리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거긴 외딴 시골 마을 청년들의 연애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그네들이 거기 모여 무얼 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사실 알고 보면 그네들은 겨우 16~20세에 지나지 않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농촌에서 농사를 거들기도 하고 그나마 중학교까지 나온 사람들은 인텔리에 속했다. 그네들이 4H를 이끌고 갔지만 그건 명목상일 뿐 연애가 더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예배당 안이 궁금해서 창틈으로 가만히 훔쳐본 적도 있었다. 거기엔 처녀총각이 나란히 앉아 무슨 얘긴가를 주고받기도 하고 이따금은 처녀가 총각 어깨를 톡톡 건드리기도 했다.


비어있는 교회는 마을 아이들의 탁아소가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남아있는 사촌언니가 선생님이 되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거였는데 인근마을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치원처럼 공부도 가르치고 노래와 율동도 가르쳤다. 나는 그 아이들보다는 나이가 많아 해당이 안 되었다. 3~5세의 어린 아이들만 탁아소에 갈 수 있다고 했다. 많이 아쉬웠다. 조금만 일찍 탁아소가 생겼더라면 나도 저렇게 예쁘게 꽃단장하고 젊고 예쁜 언니 선생님이랑 놀 수 있었을 텐데. 그 아이들은 무슨 특혜를 받는가보아 은근히 심통이 났다. 아기 티를 갓 벗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탁아소에 왔다. 물론 아이들의 엄마가 동행했다. 예쁘게 땋아서 묶은 머리에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알록달록한 색상의 원피스를 입고서였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떼쓰는 것도 다 받아주었고 평소에 사촌 언니답지 않게 이해심이 많았다. 나는 그런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이 공주라도 된 양 부럽기도 하고 시샘도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서 선생님이 아이들과 노래 부르고 율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사촌 언니였기에 나는 틈만 나면 탁아소에 가서 구경했다. 선생님이 하는 데 따라 아이들이 율동하고 노래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고, 그곳은 동화 속 궁전처럼 아늑해 보였다.


탁아소는 일시적으로 하다 곧 문을 닫았다. 교회 강당은 비워두고 기생이라는 아가씨 두 명이 교회랑 붙은 살림집에 살았다. 늙은 아버지와 두 딸이었다. 기생이 뭔지는 몰랐으나 그 기생들이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술을 판다고 했다. 술렁이는 동네 아저씨들과 기생들이 들어왔다고 안절부절 모이기만 하면 수군대는 동네 아주머니들. 나도 동생과 함께 어른들 몰래 예쁘다는 기생이 궁금하여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기생 자매는 길고 흑단 같은 머리에 웨이브 굵은 파마를 하고 뾰족구두를 신고 있었다. 입술에는 빨갛게 립스틱 칠을 한 채로였다. 말씨는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예쁜 언니가 살짝 웃어 보였다.


“너, 이 동네 사니? 들어와.”

“…….”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온 나와 동생은 쭈뼛쭈뼛 고개를 디밀었다. 무엇에 혼이라도 난 아이처럼 눈은 내리깐 채였다. 부뚜막에는 아궁이가 두 개였다. 한쪽에는 양은솥이 걸려있었다. 세간은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너, 몇 살이니? 참 예쁘게 생겼구나!”

언니의 예쁘다는 말에 갑자기 부끄러워진 나는 얼른 대답을 못 했다. 나보다 훨씬 예쁜 기생 언니는 내게 또 놀러 오라고 말했다. 방을 들여다보니 아직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좀 뭣한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그 언니들의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가 몹시 아프다고 했다. 아저씨는 연신 기침을 쿨렁거렸다. 난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그곳을 나왔다.


몸이 아픈 아버지가 방 한 칸을 지키고 있었기에 거기에서는 술을 팔 수 없었다. 어느 마을에서 부르면 준비를 해서 술을 팔러 다녔다. 그녀들은 들병이였다. 당시 나는 술이 뭔지도 술 파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그녀들이 좋았다.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흑단 같은 머리칼과 분 냄새가 나를 이끌었다. 분 냄새는 가끔 기분이 내킬 때면 화장을 하던 엄마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기에 더 좋았다. 내게 더없이 상냥한 언니들이 우리 이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갓집도 이모도 없는 우리는 엄마에게 수도 없이 물었다. 왜 외갓집이 없냐고 나도 이모 갖고 싶다고. 그러면 엄마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딱히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녀들은 한동안은 이 마을 저 마을로 꽤 바빴다. 더 깊은 안쪽 마을에는 들도 넓었고 가구 수도 많았다. 주로 같은 마을에서 그녀들을 부르기보다는 더 부자 동네인 윗마을에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동네 아낙들은 모이기만 하면

“아이고, 살다 살다 세상 말세다. 저런 불여시 같은 것들이 들어와서 집구석 다 망해버리겠네.”

친척 아주머니가 먼저 한 마디 내지른다.

“아, 누가 아니래요. 저것들 빨리 쫓아내 버려야지. 저런 요망한 년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대요. 아이구 세상에, 세상에 쯧쯧…….”

저마다 분하다는 듯 한마디씩 욕지거리를 해댔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예쁘고 착해 보이는 기생들을 동네 아주머니들이 싫어하는 것이 이상했다. 어느 집이고 그 기생들 얘기로 조용한 집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그녀들을 부르는 손님들도 줄어들었다. 처음부터 그런 골짝으로 들어온 것이 무리이긴 했다. 결국 몇 달 후, 기생 자매는 쫓겨나다시피 떠났다. 아픈 아버지를 모시고 어디로 갔는지 그 부녀들의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아낙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며 후련해했다. 난 착하고 예쁜 언니들이 떠났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병든 아버지는 어찌 되었을까. 아픈 아버지를 지키는 그녀들이 내겐 천사같이 보였다. 이제 마을에는 더 이상 그녀들처럼 예쁜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또다시 빈 교회 집에 대전 할머니가 살게 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 얘기로는 대전 할머니가 갈 곳이 없어서 친정 동네로 온다고 했다. 처음에는 친척 집에 며칠씩 머물렀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다 보니 모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안 어른들끼리 모여서 의논한 결과, 비워진 천주교회에서 살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각자 사소한 세간들을 거두고 정부에 생활보호대상자를 신청하여 양식은 정부에서 나온다고 했다. 기생들이 떠나고 빈 교회는 이제 만복이 아저씨 모자가 기거하게 되었다.


세 자매는 무슨 큰 구경이나 난 듯이 할머니 집을 기웃거렸다. 이미 집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지라 전보다는 그 집을 들어서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내 눈에는 오막살이 초가집에 사는 우리 집보다는 좋아 보였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살림살이가 제법 아기자기해 보였나 보다. 우린 마땅히 놀이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집 저집 다니거나 이 골목 저 골목 뛰어다니는 것이 일과였기에 당분간은 새로운 관심리가 생긴 셈이었다.


대전 할머니 집은 예전에 아주 부자였다고 한다. 할머니 남편은 경찰 쪽에 아주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머리가 뛰어나게 좋았던 만복이 아저씨는 외아들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했다. 어른들 말씀은 머리가 너무 좋으면 사람이 갑자기 미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저씨가 무슨 데모인가를 하다가 고문을 심하게 당해서 잘못되었다고 했다. 전기고문을 당해서 갑자기 정신이 나가버렸고, 그래서 풀려나왔다고 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은 바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얘기도 유언비어일지 모른다. 이미 아저씨는 결혼까지 해서 딸까지 있다고 하는데 데모하다가 그랬다는 게 이상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무성한 말만 돌고 돌았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저씨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원래 청각장애인은 아닌데 사람들과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고 했다. 이따금 아버지는 할머니 사시는 집에 들러서 불편한 것은 없는지 경황을 살피기도 했다. 그리고 아저씨를 놀리면 안 된다고 했다. 운이 나빠서 저렇게 되었지만 똑똑하고 마음 좋은 분이라고 했다. 아저씨는 매일 샘에서 고무 양동이로 물을 길어갔는데 그냥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걸음걸이가 빠르지도 않고 언제나 같은 보폭에 같은 속도로 샘과 교회가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몇 번씩 양동이를 들고 오갔다. 희고 길쭉한 얼굴에 눈썹은 미간 쪽이 굵고 진했다. 옷은 거의가 재색 작업복 바지에 빛바랜 카키색 점퍼를 입고서였다.


겨울에는 머플러를 두르고 어느 친척 집에서 입으라고 보내온 쥐색 바바리코트를 입었다. 아저씨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양동이를 나르는 모습은 어딘지 우스꽝스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멋쟁이로 보였다. 그 마을에서 바바리코트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처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처녀. 총각 중에서 그중 인텔리 행세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고향 집을 방문할 때 입는 게 다였다. 아무튼 아저씨는 코트 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물을 길었다. 마을에서 물을 긷는 집은 아저씨네뿐이었다. 집집마다 수도가 놓여서 수도가 얼지 않으면 이제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샘에서 물을 긷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아저씨만은 오직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에 몇 번씩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느 한 겨울날, 아버지가 물을 길어다 준 적이 있었다. 만복이 아저씨가 고뿔로 앓아누운 것이다. 할머니도 아저씨도 다니는 흔적이 보이지 않자 아버지가 교회 집으로 찾아갔다. 아저씨가 아프니 자연히 할머니를 돌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 차가운 시멘트벽엔 성에까지 낄 정도였다. 아버지가 산에서 해온 나무 한 짐으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구들장이 데워졌다. 얼었던 방에 온기가 돌자 시멘트벽에는 습기라기엔 너무 많은 물기가 흘렀다. 도배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단칸방은 불을 지펴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불 덮어 놓은 아랫목만 미적지근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아궁이에 통나무를 올려놓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방이 데워지는지 살폈다.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짚어보고는 온기를 확인했다. 두 모자는 이불을 덮어쓰고는 웅크려 앉은 건지 누운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너무나 추운 날씨는 얇은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얼려버려서 절로 금이 가고 쩍쩍 부서졌다. 노릇노릇 얄팍하게 잘 구워진 누룽지처럼 그랬다. 가뜩이나 서글픈 세간 살림이 또 하나 줄었다. 할머니와 아저씨는 끓는 물에 우리 집에서 가져간 밥을 삶아 요기를 했다.


며칠 후 아저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여전히 양동이를 들고 전보다 힘없는 몸짓으로 물을 길어 날랐다. 표정 없는 아저씨를 지나는 길에 마주치면 나는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혼자 무얼 중얼거리는 것인지 약간 미소를 띨 뿐이었다. 겨울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나기가 더 힘겹다. 그건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몸도 마음도 온전하지 못한 아저씨와 늙은 할머니는 더했다. 날씨가 대한이 물러가고 좀 풀리니 할머니도 동네에 마실을 다녔다. 동산을 넘어 샛골에 다녀오다 우리 집에 들렀다. 그리고 동네 소식을 물어다 줬다. 그렇게 할머니와 아저씨는 마을에서 있는 둥 없는 둥 해를 거듭해갔다.


물을 긷고 가는 아저씨와 마주치면 나는 매번 꼬박꼬박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는 ‘그래’, 하는 말 한마디 없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무표정 같기도 한 얼굴로 지나쳤다. 몇 번을 인사해도 별 반응이 없자 심드렁해진 나는 나중에는 아저씨와 마주치면 그냥 힐끗힐끗 엿보며 지나치기도 했다. 참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분명히 말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느 날 물동이를 들고 지나가는 아저씨가 혼자서 무슨 말인가를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난 무슨 빅뉴스라도 되는 듯 집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숨이 턱에 차도록 삽짝으로 들어서서는

“아버지, 있잖아. 만복이 아저씨 말 하는 것 들었어.”

“그래…….”

아버지는 무심한 듯 한마디 대답하고는 더 이상 말씀이 없었다. 아버지보다는 아저씨가 나이가 적었다. 거의 말수가 없던 아저씨는 아주 가끔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듯 했지만 아버지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모자는 그냥 오갈 곳 없는, 마을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외따로 떨어진 집에서 마을 사람이 아닌 양 그렇게 살았다. 시골 인심이라고 하지만 집집마다 사정이 다 달랐다. 땅도 돈도 많은 부잣집이라도 박절하기 그지없는 집이 있는가 하면, 좀 없이 살고 부족해도 자기욕심보다는 남에게 인정스러운 집도 있었다. 우리 집은 후자에 속했지만 우리 먹고살기가 더 급급했다. 그래도 인심만은 야박하지 않은 부모님이었다. 어쨌든 같은 성씨 집성촌인 곳에서 그 모자와 친척이 아닌 집들이 거의 없었지만, 반기는 집 또한 별로 없었다. 마실(이웃집에 놀러가는 것) 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고, 갔다가도 반은 쫓겨나오다시피 해야 했다. 특히나 잘사는 집일수록 박대함은 더 심했다. 어떤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구동성으로


“아, 저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그렇지 그래, 친정 동네로 어찌 돌아올 생각을 하나…….”

동네 아낙들은 이따금 그들의 처지가 딱하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모자를 누군가 맡아서 온전히 보살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마을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며 그들의 눈치를 보고 약간의 음식을 얻어가는 할머니도 처음에는 그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배고픔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던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야 연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목숨을 끊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미 누군가에게 큰소리 칠만큼 젊음도 사라지고, 힘도 없는 할머니는 이젠 그런 것에는 체념한 듯 보였다. 그래도 예전 대갓집에서 자란 사람답게 사리 분별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느 때 말씀하는 걸 들어보면 아는 것도 참 많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잘 알았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현재 위치는 부랑자와 마찬가지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성치 않은 아들까지 덤인 채였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당신 사후에 남겨질 아들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할머니는 할머니이기 이전에 엄마였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자식은 언제나 걱정스럽다. 그리고 아저씨는 아픈 사람이기에 더 그랬다.


대전 할머니는 편하게 살아서 부엌살림도 잘 못한다고 했다. 아저씨가 길어온 물로 밥을 지어서 할머니를 드린다고 했다. 엄마는 이따금 김치 같은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도 자주 들리곤 했는데 세수를 하지 않아서 눈에 눈곱이 주렁주렁 달려있을 때가 많았다. 좀 까탈스럽던 나는 그 모습을 보면 밥 먹다가 숟가락을 놓고는 당돌하게

“할머니 세수 좀 하세요!”

팩 쏘아붙였다. 철이 없었던 나는 아버지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파란만장한 삶만큼이나 얼굴에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했다. 가로 세로로 얼기설기 얽힌 주름이 할머니의 고달픈 삶을 대신 말해주었다. 그 쪼글쪼글한 것은 너무나 선명해 골짜기를 이루었다. 물 한 방울 흘러가지 않는 검고 마른 계곡이었다. 백발에 흐트러진 머리는 겨우 쪽을 찐 형상만 갖췄다. 비녀는 옥빛을 띤 플라스틱이었다. 머리칼도 비녀도 너무나 가벼워서 닿기만 해도 스르륵 연기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세수는 거의 하지 않는 듯 보였고, 어떤 때는 코가 흘러나온 적도 있었다. 난 진저리나는 비명을 질렀고, 그걸 본 엄마는

“고모, 잠깐만요. 코 좀 닦아야겠어요.”

할머니 코를 종이로 닦아줬다.

“아, 더러워!”

또 소리를 내는 내 등짝을 엄마가 후려쳤다.

“에구 고만 시끄럽다.”

나는 내 버릇없는 말투를 반성하기보다 애먼 등짝 맞은 것이 억울해 입을 비죽거렸다.


어느 날인가는 샛골에 갔다 온 할머니 치마에 피가 묻어있었다. 깜짝 놀란 엄마가 할머니한테

“고모, 치마에 핏자국은 어디서 묻었어요?”

할머니는 눈만 껌뻑거렸다. 엄마는 어린 우리가 듣는데 더는 자세히 못 묻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다행히 핏자국은 어디서 묻은 듯 보였고, 할머니 몸에서 흐르는 핏물이 아니었기에 다행이라고 여겼다. 할머니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는 졸리는지 눈만 끔뻑거렸다. 할머니가 눈을 껌뻑거릴 때마다 한쪽 눈은 세 겹으로 생긴 눈꺼풀에 눈이 이상하게 커지고 그 때문에 떠구룩떠구룩 소리까지 났다.

“하하하하, 할머니 눈이 이상해요. 자꾸 커졌다 작아졌다 하잖아요.”

내가 놀리는 말에도 역시 할머니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지 말거라!”

버릇없다고 여긴 엄마가 나를 나무랐다. 난 꾸지람을 듣고서도 툴툴거렸다.

“있는 사실을 얘기하는 게 뭐 어떻다고 나한테 그래?”

한 마디 팩 쏘아붙이고는 고샅으로 줄행랑을 쳤다.


고샅 안쪽에 있는 옥자네 집으로 갔다. 그 집 사랑방은 꽤 넓었다. 겨울에는 옥자네 아버지가 군불을 부지런히 지펴도 외풍이 대단했다.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있지 않으면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잠시라도 옥자네 사랑방에 서서 서성거리는 날에는 코끝이 빨갛게 얼고 매웠다. 그래도 나는 초등 시절 내내 그 집 사랑방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었다. 이따금은 옥자네 아버지한테 욕지거리까지 들어야 했다. 마을 아이들과 숨바꼭질한다고 남의 집에 숨은 것이 화근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지게 한가득 해 오신 옥자네 아버지와 난 딱 마주쳤다. 그것도 그 집 뜨럭(뜨락) 밑에 엎드려 있다가 마주친 것이다. 옥자네 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이 망할 년이 왜 남의 집에서 얼쩡거려?”

욕지거리에 난 부리나케 그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욕을 먹을 상황이 아닌 데도 민망함과 속상함에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주먹을 꼭 쥐고 고샅으로 내달렸다.


마침 산에서 나무를 한 지게 가득 해오던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기분 나쁘게 욕먹은 일이 떠올랐다. 욕먹은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려다 참았다. 그 소리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아버지가 아니었다. 당신 귀한 딸을 욕먹게 했다고 친척 아재뻘인 옥자네 아버지께 달려들 것이 뻔했다. 굳이 아버지께 말하지 않아도 분명히 내 편이 될 아버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옥자네 아버지를 이긴 것 같았다. 아버지는 누구와 싸워도 절대로 질 사람이 아닌 것 같았지만, 아버지가 남들과 싸우게 되면 여러 가지 말이 오고 가고 그러면 가진 게 없는 아버지는 속이 상할 것 같았다. 언제나 아버지가 다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걱정되었고, 큰소리 이면에는 아버지의 기죽은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대전 할머니는 그 동네에서는 우리 집에 제일 자주 드나들었다. 어떤 때는 남의 집에서 얻은 떡을 먹으라고 갖다주기도 했다. 유난스럽게 까다로웠던 나는 그 떡을 먹지 않았다. 엄마가 왜 안 먹느냐고 물어보면 더러워서 안 먹는다고 했다. 그래도 먹을 게 부족했던 우리 집인지라 엄마, 언니, 동생까지 잘도 먹었다. 유독 나만 비위가 약했다. 나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 내 수저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고, 숟가락에서 비린내가 나면 역해서 아무것도 못 먹었다. 그 덕분에 엄마는 일 년에 몇 번씩 수저를 끓는 물에 삶아야 했다. 우리 집도 누구 집 못지않게 가난했고 할머니네 만큼은 아니지만 못산다고 멸시 비슷한 것을 받아야 했다. 아마도 할머니를 그나마 반겨준 집은 우리 집이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겨울이 되면 엄마는 시래기를 소죽솥에 한가득 삶아서는 된장으로 버무려 둔다. 그러면 겨우 내내 국거리가 된다. 중간 크기의 단지에 가득 담긴 시래기 양념장을 한 국자씩 퍼서 쌀뜨물에 끓였다. 처음에는 맛이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신맛이 돌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국을 끓이면 시큼한 맛이 났다. 그걸 버리지 않고 끓여먹었다. 난 시어 못 먹는다고 툴툴대고 그럴 때면 엄마에게 눈 흘김을 받아야 했다. 반찬은 배추김치 한 가지일 때가 많았다. 깻잎김치나 무말랭이는 일찍 떨어지고 긴긴 겨울을 오로지 김장김치 한 가지와 시래깃국 한 가지로 보냈다. 전기밥솥이 없어서 아침에 가마솥에 밥을 하면 아침을 먹고 남은 것은 커다란 찬합에 담아서 아랫목에 이불로 꽁꽁 싸둔다. 그러면 점심때가 되어도 금방 한 밥 같지는 않아도 차지 않고 먹을 만했다. 그러다가 밥을 많이 해서 남기라도 하면 저녁은 그냥 맹물에 삶아 먹었다. 난 그게 그렇게 싫었다. 삶은 밥을 먹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하지만 먹어야 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밥 삶은 국물까지 김치쪼가리 하나로 다 먹었다.


이따금 때가 되어 할머니가 오면 함께 식사를 하는 적이 많았다. 누가 뭐라고 싫은 눈치를 주지 않아도 할머니는 밥상머리에서 언제나 멈칫했다. 아버지나 엄마가

“고모, 많이 잡사요.”

한마디 거들면

“잘 먹겠네.”

하고는 숟가락을 쥔다. 어쩌면 다 망하고 난 이후로는 할머니는 계속 그렇게 눈치를 봤는지 모른다. 한편 생각하면 할머니가 안 되었고 불쌍했다. 특히나 엄마로부터 예전 할머니가 잘살 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아니면 엄마가 할머니께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대전 고모, 예전에 살던 얘기 좀 해보세요.”

“무슨 얘기를 자꾸 해.”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웠던 지난날을 읊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는 아쉬워하는 게 역력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들 자랑이었다. 단 하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외아들, 만복이 아저씨 이야기다.

“우리 만복이가 클 때는 참 똑똑했지. 모두들 천재라고 했어. 공부는 얼마나 잘했다고…….”
“고모, 그렇게 똑똑한 아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이? 아유 어쩐대요.”
“어째 알아? 갑자기 다 나아서 좋아질는지……그렇게만 되면 만복이가 똑똑해서 군수를 해 먹을지 면장을 해 먹을지 모르는 일이여. 이름대로 일만 만(萬)자에 복 복(福) 자가 들었으니 만복을 받을 거구먼. 암, 그렇지. 지금 이렇다고 사람을 그렇게 괄시하면 안 되는 것이여.”

할머니는 얘기 끝에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낡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꾹꾹 찍었다.

“아유, 고모 울지 마세요. 지가 괜한 얘기를 했나 봐요.”

갑자기 곡지통을 터뜨리는 할머니를 엄마가 달랬다. 그러자 간신히 울음을 그치는 할머니가 그때만큼은 더 가여웠다. 할머니는 아직도 만복이 아저씨가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듯 보였다. 그러면 예전 며느리도 돌아올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 말에 엄마는 언제나 희망적인 얘기로 맞장구를 쳤다.


할머니는 꽤 오래 살았다. 가진 것 없고 아들도 성치 않은데 건강한 편이었다. 할머니 말씀이 정상이 아닌 아들을 두고 먼저 갈 수 없다고 했다. 언젠가는 아픈 게 다 낳아서 예전처럼 똑똑한 아들이 되면 업신여기던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조아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얘기 끝에 꼭 되새기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못내 아들을 애처로워했다.

“내가 먼저 죽으면 우리 만복이는 어떻게 해? 그래서 나는 눈을 못 감아…….”
“그럼요. 고모 오래오래 사셔야지요.”

할머니의 말씀에 엄마가 또 맞장구를 쳤다. 도대체 엄마는 본심으로 하는 얘기일까? 완전한 본심은 아닌 듯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구질구질하게 오래 사는 것이 덕담만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엄마의 맞장구, 나는 그 말뜻이 이해가 안 되었다. 초등학생이 그 뜻을 이해하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몇 년을 잘 다니던 할머니가 언젠가부터 걸음을 안 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아픈 건 아닌가 걱정했다. 아버지가 가보더니 할머니가 아프다고 했다. 우리들은 별 관심도 없었다. 씻지도 않고 옷도 자주 빨아 입지 않아 몸에서 냄새가 나는 할머니가 오지 않길 은근히 바랐다. 그렇게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보호자인 아들은 무능력자에 정신까지 온전하지 않았기에 아저씨가 맡아서 장례를 치른다는 건 기대할 수 없었다. 친척들의 회의 끝에 동네에서 장례를 치러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살아 있을 때, 따뜻하게 대해주지도 못했는데 막상 사람이 죽고 없어지니 안됐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했는지 그때만큼은 모질게 외면하는 집이 없었다. 확실히 죽음 앞에는 약해지는 게 사람인가 보았다. 동네 사람들끼리 약간의 돈을 추렴해서 관을 샀고 간단히 장례를 치렀다. 할머니는 그렇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아저씨는 혼자 남겨졌다. 아버지는 아저씨를 걱정했다. 노모라도 옆에 있는 것이 위안이라도 되는데 아무도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저씨가 마을에서 자취를 감췄다. 어디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 집에 세간은 방금까지 사람이 있은 듯 그대로라고 했다. 마을에서는 몇몇 어른들이 면 소재지로 근처 산으로 찾으러 다녔지만 허사였다. 아저씨의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훗날 어떤 사람은 아저씨 본가로 갔다고도 하고 정신병원에서 데려갔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와 아저씨가 가엾다고 했다. 아저씨가 정신을 놓고 싶어서 놓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쁜 일이 생기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고 했다. 우리가 아직 어려서 이해가 안 될 거라고도 했다.


아버지는 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복이 아저씨가 죽지만 않았으면, 소문대로 본가로 돌아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휴-휴-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에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 정도로 철이 들지 않기도 했다. 그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아버지의 안색만 살필 뿐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니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도 나도 그 일을 잊었다. 내 나이가 꼭 그때 아저씨 나이와 비슷해졌다. 이후로는 아무도 천주교회에 사는 사람이 없었고 폐허로 남은 교회엔 잿빛 그늘이 졌고 이따금 새들이 날아다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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