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습이 가져온 불행
내가 초가집에 살 때 옆집에는 젊어서 청상이 된 할머니와 장성한 딸 둘, 중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있었다. 우리와 먼 친척뻘이었는데 큰딸이 스무 살 무렵 마을 청년과 눈이 맞았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마주 보고 있는 두 집은 오고 가는 데도 몇 걸음 되지 않았다. 청년의 집안은 윤 씨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에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가 파평 윤 씨가 그 마을에서는 '상놈'으로 불리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지 80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존재한 마을은 둘의 연애로 술렁거렸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된 지가 언제 적인데 기득권이었던 서 씨들의 여론으로 인해 둘은 몰래 숨어 만나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둘의 이야기로 집안이 달라서 안 된다, 명색이 양반 집안에서 어떻게 상놈의 사위를 보느냐며 설전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며 총각이 성실하면 그만이지라고 했으나, 아버지보다 더 연세가 많고 항렬이 높은 친척 어르신들의 서슬 퍼런 반대에 청춘남녀는 마음을 졸여야 했다.
옆집 할머니의 반대 또한 극심했다. 금족령이 내려지고 집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런 반대에도 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순 없었다. 당당하게 만날 수 없는 둘은 세 마을이 갈라지는 중간에 있는 방앗간에서 몰래 만남을 이어갔다. 혼자서는 외출이 안 되는지라 옆집 언니는 당시 서너 살밖에 되지 않은 나를 업고 나섰다. 이유는 내가 자꾸 어디를 가자고 보챈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댄 것이다. 그러기 전 언니는 내게 언니의 넓은 목도리로 내 머리를 감싸고는 나를 업었다. 나를 업고 나가야지 동네 사람들 눈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겠다는 복선이 깔려 있었다. 내게 사탕을 쥐어주며 나가자고 조르라고 미리 다짐을 해둔 터였다. 나는 엄마처럼 업어주는 언니가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고 떼를 쓰듯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할머니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긴 했으나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것은 성공이었다. 나는 언니의 데이트에 눈가림할 역할이었지만 나를 예뻐하고 귀하게 대했기에 언니 등에 업히는 게 좋았다. 언니는 방앗간 옆 담배포에 나를 맡겨두고 한참을 어디로 갔다가 다시 나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그 일은 이후로도 몇 번 계속되었다. 언니가 몰래 연애를 하기 위해 나를 업고 나간 것도 있지만 그러기 전에도 언니 둘은 이모처럼 우리 자매들을 돌봐주고는 했다. 특히 나를 가장 예뻐했는데 추운 겨울날 내가 춥지 않게 폭 싸서 둘러업고 나간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둘의 사랑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윤씨네 총각은 마을 어른들께 꾸중을 들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몇 년의 연애 후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옆집 할머니는 사윗감이 마음에 들지 않고 같은 마을에 시집보내는 것과 집안이 좋지 않은 걸 들어 남 부끄럽다고 했으나 혼례를 올리자 그 말도 쏙 들어갔다. 윤씨네 할머니는 풍채가 크고 성격도 너그러웠다. 어린 내 눈에 할머니이지 쉰도 되지 않은 아주머니였다. 신혼부부는 결혼을 하자마자 일자리를 찾아 강원도 태백에 있는 광산으로 떠났다.
윤씨네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는 상황에다 농사 지을 땅마지기도 없는 터라 먹고살기 위해 멀리로 떠난 것이다. 광산에서는 사택도 지급되고 월급도 나왔기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부부는 한 번씩 고향에 다녀가고는 했는데 양가가 모두 한 마을에 있으니 다녀가기는 수월했다. 얼마 안 있어 첫아들을 낳고 잘 산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러다가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 때 쌍둥이를 낳았는데 아들, 딸 이란성쌍둥이였다. 언니는 엄마보다는 젊었지만 계몽이 덜 되어서인지 아들 딸 쌍둥이를 키우면 아들이 죽는다는 미신을 어디에서 들었던지 딸을 낳자마자 죽으라고 엎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윤씨네 할머니가 손녀를 거두어 키웠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미신이라고 해도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으라고 엎어놓을 수 있는지 마을 사람들은 독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마음 좋은 윤씨네 할머니는 손녀를 데려다가 분유를 타 먹이고 쌀가루를 빻아 죽을 끓여 먹이며 손녀를 돌봤다. 아들, 딸, 쌍둥이, 다시 딸까지 총 다섯 명을 낳은 언니는 시댁에 다니러 와서도 딸은 본 척 만 척 시어머니에게 갖다 버리라는 막말을 하며 자신이 낳은 딸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녀를 아들만 생각하는 엄마로 몰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에 큰 점이 있어 '점순이'라 불리던 아이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가 선택해서 낳은 게 아니라 부모가 낳았는데 버림받는 불행을 겪은 것이다.
딸만 보면 죽일 듯 학대하는 며느리를 말리느라 마음 좋은 윤 씨 할머니는 전전긍긍했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딸을 굶겨죽이겠다고 젖을 안 줘 얼마나 굶었는지 시골에 데려와서 분유를 주니 그 어린 아기가 젖병을 손으로 잡고 악착같이 먹더라는 이야기가 돌았고, 궁금해 내가 본 모습은 갓난아이 같지 않게 젖병을 물리면 양손으로 꽉 잡고 열심히 젖꼭지를 빨았다. 생존의 본능이 발동했음인지 아기는 살기 위해 갖은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버림받아 천덕꾸러기가 된 점순이는 친할머니 품에서 무럭무럭 잘 자랐다. 시간이 몇 년 흘러도 아무 일이 없자 자기 자식이니 거둬가라는 시어머니 말에도 언니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딸을 외면했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은 그토록 사랑해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두 사람에게 비극이 닥쳤는데 큰아들이 철길에서 놀다가 치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의 목숨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알 수 없는 현실에서 언니는 그 모든 사달이 점순이 때문이라며 더욱 딸을 싫어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 넷을 남겨두고 둘은 이혼했다. 후문으로는 남자가 바람을 피웠고 여자가 노름에 빠졌다는 말이 풍문으로 날아들었으나 이후 그들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나 역시 성장해서 외지로 나왔고 남의 불행한 가정사를 시시콜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토록 구박받고 천덕꾸러기로 자라던 점순이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지금은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면 가끔 나를 푹 싸서 업어주던 언니가 궁금해진다. 촌수로는 언니지만 나이로는 이모뻘인 그녀가 일흔은 훌쩍 넘겼으리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서 아쉽지만 그때 당시 둘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