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빈백에서 독서하기

by 글마루

볼 일이 있어 조퇴하고 일이 일찍 끝나 산책을 할까 하다가 도서관으로 향했다. 빌려놓고 다 읽지 못한 책을 다시 꺼내 들고 앉을 곳을 찾았다. 저녁때가 되어서인지 웬일로 빈백에 빈자리가 났다. 이게 웬 떡이야,라는 생각이 들며 창이 좋은 자리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몸을 부렸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는데 제르베즈라는 여인이 애인에게 버림받고 다른 남자와 다시 만나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파리 하층민의 비참하고도 처절한 생활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을 읽노라면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예전의 나와 닮은 듯도 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인물들의 불행한 순간이 언제 툭 튀어나올지 몰라 아슬아슬하게 마음을 졸이지만 어쨌든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끝난 결말이다.

책을 읽기 전 나는 먼저 목차를 보거나 인터넷에서 후기를 읽어보고 본격적으로 읽기도 하지만 미리 내용을 알면 뭔가 신비로움이 깨지는 것 같아 요즘은 읽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글과 마주한다. 서평도 저마다의 관점이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모범답안은 아니기에 내가 책을 읽고 그 느낌에 대한 걸 나름대로 생각하고 정의 내리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어떤 작품이 뚜렷이 주제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꼭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야 훌륭한 작품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예전에 나는 어떤 갈래든 그 텍스트에는 반드시 하고자 한 말(주제)이 드러나야 제대로 된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떤 이야기는 그 자체로써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층민들이 지지리 궁상만 떨다가 죽음으로 결론이 나거나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허무, 상실, 부도덕, 부조리, 폭력, 죽음 등 부정적인 주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삶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부정적이고 비참한 인물에 대한 동정, 멸시, 조롱, 경멸, 공감을 함으로써 서로 다른 인간 군상들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좋지 않은 상황이 생겼을 때 좀 유연해질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나와 비슷하거나 더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인생 자체가 죽음이나 더 좋지 못한 상황 속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꿈을 꾸고 꿈을 이루면 좋겠지만, 어떤 이의 삶은 꿈도 꾸지 못하거나 꿈만 꾸고 꿈에 다가가기도 전에 좌절하거나 끝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이 무가치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실패하고 다 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가치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 가치라는 것도 타인이 아닌 어쩌면 그 자신이 판단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무리 비참한 삶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이라도 그의 삶은 그대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의 모습이 한심하고, 비열하고, 안타깝고, 불쌍하고, 가소롭고, 뻔뻔하고, 교활하고, 속상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과 마주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때면 인물의 감정에 이입이 깊게 되는 편이다. 더군다나 그 작품이 자전적인 소설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어 그 안에서 다른 등장인물들과 대립한다. 특히 대하소설 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한데 다 읽고 난 후에는 그 인물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돼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읽을 때 파렴치하고 증오스럽던 인물도 나중에는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원래 악인으로 태어났음인가? 무엇이 그를 그토록 악랄하게 만들었을까?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인물 가엾지 않은 게 없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모르는 곳에 던져짐과 같다고 하면 비약이 심한 걸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주어진 역할을 다 하는 것. 제르베즈 역시 살아내기 위해 오염되고 냄새나는 사람들의 더러운 빨래를 하며 삶을 영위한다. 그리고는 비참하고 허무하고 불행한 죽음을 맞는다. 실화이든 가상이든 세상에 태어나 치열하게 살아낸 인물들에게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위로해주고 싶은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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