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주는 누군가,
오징어 다리가 좀 짧은 거 같은데?
아니야, 오징어 눈이 너무 인위적이고 좀 크지 않아?
그럼 자연스럽게 오징어 눈을 다리로 살짝 가려보는 건 어떨까?
오징어 다리의 빨판이 보이는 게 좋을까?
먹물을 뿜는 부분을 확대하는 게 좋을까?
회의실에 모여 오징어 캐릭터를 앞에 두고 디자인팀 팀원들이 모여 난상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장품 회사 헤어사업부 담당 막내디자이너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출시되는 오징어 먹물 헤어 염색제 패키지에 들어갈 캐릭터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는데, 이 오징어는 패키지 오른쪽 하단에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들어가는 캐릭터였다. 오징어에 머리카락을 가발처럼 씌우자는 의견까지 나오자, 막내인 나로서도 이 회의는 끝이 안보이겠다는 생각에 아찔했었다. 매번 이런 회의의 연속이었다. 패키지 뒷면에 들어가는 친환경 염모제 성분을 강조하고자 허브성분 표기를 시각화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허브 일러스트를 앞에 두고도 끝없는 토론이 이어졌다. 폰트 서체와 컬러 하나를 정할 때에도 경쟁업체와 겹치는 디자인은 없는지, 매대에 올려놓았을 때 주목도를 높일 수 있는지, 제품 컨셉과 맞는지에 고민했다. 제품의 기획자와 개발자, 영업사원, 디자이너가 모두 모여 수많은 조율이 이뤄진 다음 제품이 출시되나 싶었는데, 식약청의 성분허가 승인됐는지, 제대로 상품이 생산되는지 품질관리팀의 꼼꼼한 사인이 떨어진 후에 매장에 출시가 기능했었다. 디자인에 참여한 첫 패키지 디자인이 시장에 출시되자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애정을 쏟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에 때아닌 출산 간접 체험을 했었다. 매장에 들러 사비로 제품을 몽땅 사들여 연말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내가 디자인한 제품이라고 하자 친구들은 염색제 패키지가 감각적이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정작 오징어 빨판의 위치를 바꾸느라 밤샘작업을 했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신제품을 만나면 ‘이 제품은 무슨 맛이지? 어떤 기능을 하지?’라는 생각보다는 신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기까지의 노고가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요거트 신제품이 나오면 ‘유럽 마트 시장조사는 했겠지? 로고타입의 가독성은 좀 떨어지지만 저칼로리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가는 서체를 썼겠구나!’ 그들의 치열했던 회의 현장도 순식간에 그려졌다. 이게 꼭 디자인작업뿐만은 아닐 것이다. 여러 번의 성능테스트 후 출시가 된 것 일 테고, 식당에서 만나는 음식들도 상권과 경쟁업체 분석을 통해 배출해 낸 데이터 값 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들의 시선을 상식적인 맛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혹은 눈에 거슬리는 디자인이 아니라면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나 조차도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제품개발을 해보니, 내가 그토록 고민했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휘발되어 날아가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노력에 한번 더 시선을 멈춰 보기로 했다.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의 숨은 제작과정의 면면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을 단 한 명만 이라도 관심 가져준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애착도 늘어나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쉽게 결정되는 것이 없고, 그 어떤 일도 하찮은 일이 없다는 것을 담아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을 딱 한 명만이라도 응원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글이 다른 이들에게도 응원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