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는 것에서 찾은 노력 <블루블랙>
상반기 야심 차게 밀어붙였던 탈모방지 샴푸 판매가 저조해지면서 머리숱이 얼마 남지 않은 사업부장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회의에 들어왔다. 사장님께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왔는지 훤히 드러난 윗머리가 팀원들에게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하반기 전략회의 내내 반짝이는 아이디어들로 빠르게 의견이 모아졌다. 하반기 ‘염모제 라인강화’ 비전에 맞춰 진행된 회의에서 당사 매출순위가 높은 헤어 컬러와 경쟁사 신규 헤어컬러분석 브리핑 그리고 염모제시장동향을 발표가 끝난 뒤 ‘블루블랙컬러’가 이번 시즌 대표컬러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연구실에서 관련 샘플이 도착한 날 다급하지만 다정하게, 업무적이지만 따뜻한 느낌으로 선배가 내게 말을 건넸다.
‘막내. 염색은 자주 해봤어?’
몇 번의 질문이 오가고 나는 2층 사내 미용실의자에 앉았다. 사회초년생 입장에서 염색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던지라 신제품 염색을 해 주신다는 말에 흔쾌히 수락했다. 시술하는 내내 연구개발, 상품기획, 상품교육 담당자들 모두 내 뒤통수만 바라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거나,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 등 적극적으로 내 머리를 탐색했다. 염색하는 내내 선배들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릴 때 걸음마 하는 모습을 가족들이 흐뭇하게 바라봐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염색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선배가 한마디 던졌다.
‘막내, 옥상으로 올라와!’
옥상..으로? 시술받으며 잘못한 게 있었나? 졸지도 않고 업무의 연장이라는 생각에 담당자님들 말에 귀 기울이며 있었고, 묻는 말에 선 넘는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자세가 잘못됐었나? 다리는 꼬고 앉았었나?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당황하면 진짜 홀린 것처럼 좀 전에 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등뒤에 나는 건 식은땀인 건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옥상에 도착했다.
옥상에 들어서자 담당자들은 나를 가운데 두고 뺑 돌아 감쌌다. 나도 모르게 눈을 깔고 서있으니 다 같이 몰려와 내 머리를 휘적거렸다. 이 회사는 상무든 사원이든 모두 고개를 떨구게 하는 아주 평등한 회사라는 생각을 했다.
옥상으로 부른 건 자연 빛에 따라 머리의 발색이 정도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담당자들의 의견을 듣다 보니 좀 이상한 상황이 감지 됐다. ‘여기는 블루 빛이 많이 보는데 이쪽은 붉은 기가 좀 올라온다. 내 머릿결의 컨디션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건가? 놀라 물으니 내 머리에 세 개의 브랜드가 염색되었다고 한다. 브랜드는 다르지만 다 같은 블루 블랙이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라는 배려심 넘치는 멘트와 함께 말이다. 그렇다 내 뒤통수를 여럿이 뚫어져라 쳐다봤던 건 경쟁사 분석자료가 바로 내 뒤통수였고 나를 흐뭇하게 바라봤던 건 결과보고를 위한 애정 어린 시선이었다. 그제야 뒷거울로 바라본 내 머리는 정교하게 세 파트로 나눠져 명도 단계 표처럼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블랙이 진하고 두껍게 느껴졌다. 선배들의 배려 덕분에 삼단계 머리스타 일로을 일주일간 유지하며 물 빠짐 정도를 파악했다. 머리상태 확인 뒤 초콜릿색으로 재염색을 해주었고, 결과 보고도 달달하게 마무리되었다. 기존 성분 배합에서 블루컬러의 발색을 조금 낮추기로 하고 몇 번의 샘플링 테스트가 끝난 뒤 제품이 완료되었다.
제품이 최종적으로 완료가 되었다는 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디자인 전쟁이 시작된다. 제품 출시일에 맞춰 일정표를 세우고 패키지 디자인 메인 컬러 회의가 시작됐다. 인쇄할 때 주로 쓰이는 CMYK 색 모형이 쓰인다. 4가지 색(Cyan· Magenta ·Yellow· Black)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색을 연출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그린컬러를 만들기 위해 사이언과 옐로 컬러를 섞어 만드는 식이다. 블랙컬러는 블랙 한 가지 색으로도 사용이 가능하지만, 블랙에 다른 색이 더해지면 그 깊이가 깊어진다. 블랙에 사이언(Cyan) 색이 더해지면 탁한 수족관 물색이지만 여기에 마젠타(Magenta ) 색이 더해지면 깊은 심해 속 물색이 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내 모니터 뒤에 팀원들이 모여 블랙 100%에 어떤 색을 더 넣으면 좋을지 의견을 낸다. 나는 마치 대화를 엿들은 인공지능이 제안해 주듯, 색상표 위에서 다양한 의견에 맞춰 색 배합을 하며 의견을 좁혀갔다. 미세한 이런 차이는 모니터로 확인이 잘 되지 않아, 여러 개의 블랙컬러 시안을 인쇄하여 회의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이미 시간은 퇴근시간을 훌쩍 넘었고 의견을 들으러 고개를 들으니 팀원들 얼굴은 모두 흙빛이었다.
우주에서 가장 검고 진한 블랙이라 불리는 ‘반타 블랙’은 빛을 99.96% 흡수해 세상에서 진한 검은색을 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2 이후에 개발된 블랙컬러로 반타 블랙을 본 이들은 마치 블랙홀이 시공간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때 당시 패키지 디자인 제작을 위해 연일 이어지는 야근으로 여러 번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했었기에 아마도 그때는 블루블랙이 우리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반타블랙이 개발되기 오래전에 새로운 블랙의 혁명을 먼저 접했던 것이다.
결국 패키지 메인 컬러는 C92%, M67% Y9% K100% 4가지 색상 모두 조합된 블랙으로 정해졌다. 그냥 보기엔 심플한 블랙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블랙에는 염모제의 색상을 고려와 둔탁하지 않고 세련된 브랜드의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부서의 의견조율이 담겨있었다.
많은 이들의 열정이 모여 헤어컬러가 힘들게 정해졌다. 컬러 선정을 하기 위해 속이 새까 많게 타고, 패키지 디자인이 나오는 동안 블랙홀에 빠진 것 같은 경험들이 여러 번 있었다. 모든 부서의 의견이 모아지듯 모든 색을 품기도 빨아들이기도 하는 블랙은 포용과 매력을 뜻하는 컬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짜장면도 검은콩도 먹지 않았지만 옷장 속엔 블랙은 여전히 가득했다.
블랙에 그렇게 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