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연의 소중함
연말 성시경 콘서트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공연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노래를 주로 듣던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도 좋았다. 노래만큼이나 대화가 풍성해서 더 좋았던 공연이었다. 그는 자신의 곡 하나하나 부르게 된 계기와 배경들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2000년대 초반, 그의 노래를 들을 땐 그저 내 감정에 맞춰 음악을 들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곡에 담긴 이야기와 설명을 함께 들으니 노래에 더 깊이 몰입 할 수 있었다. 마치 데일리로 마시던 와인을 소믈리에의 설명을 듣고 다시 마신 느낌이었다. 와인에서 해풍을 맞은 포도의 솔티한 맛이 느껴지는 것처럼, 노래에서 그때의 찌질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한번 더 이별' 노래 마지막 부분 가사는 이렇다. '이제서야 안녕, 한 번도 안 했던 말 안녕, 다시 올 것 같던 나 혼자만의 오랜 기대였던 그날들이 내겐 필요했어요. 많은 걸 깨닫게 했던 그 이별을 난 한번 더 오늘 할게요. 그 어디에서 살더라도 제발 나쁜 안부 안 들리게'
이미 헤어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직 이별을 하지 못해 스스로 다시 한번 이별을 하는 노래다. 나와 인연이었던 상대가 나쁜 안부만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서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차가 쌓이며 업무가 익숙해졌다. 어떤 일이든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프로세스가 그려지며 일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시기에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마트 경영을 시작했다. 고객에게 먼저 인사하는 일부터 재무제표를 보는 일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마치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날로 되돌아간 기분이었지만 그때와 상황은 전혀 달랐다. 개인적인 업무능력과 뜨거운 의욕보다는 전체 흐름을 읽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매장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며 선반을 잡았을 때, 매대에 있던 건 호두와 견과류들이 있었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신호 같았다. 그 와중에 흐물거리는 젤리가 눈앞에 보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마음을 다독였다. S마트에 첫 출근한 2021년은 코로나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때였다. 백신을 맞기 시작했지만 사회적 거리는 2단계가 유지되고 있었고, 밤 10시 이후 음식점 영업제한과 4인이상 모임금지로 많은 식당과 카페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식당과 장례식장이 주요 고객이던 S마트 역시 코로나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었다. B2B 고객이 줄어든 상황에서, 일반 고객을 늘리기 위해 소포장 제품을 하나둘 늘려가고 있었다.
그 무렵, 원주 맘카페를 중심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S마트가 신천지에서 운영하는 마트라는 이야기였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신천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2020년 코로나가 확산되던 당시, 종교 집회로 인해 감염이 급속히 퍼졌다는 뉴스 정도가 전부였다. 어떤 종교인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터라 이 상황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무엇부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번졌고, 매장을 찾던 고객들의 발걸음도 서서히 끊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객이 구매한 유제품에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상품이 나왔다는 항의가 잇따랐다. 해당 제품을 먹은 아이가 탈이 났다며 소비자 고발로 이어졌다. 일이 한꺼번에 몰아치자 정말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니라는 건 언젠가 알아주겠지’라며 무대응으로 버텨오던 S마트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신천지 소문의 출처와 유제품 유통기한 사건의 전말을 분명히 밝혀야 했다.
사이버수사대의 조사 결과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마트 근처에 신천지 교육장이 있는데, 교육을 받으러 온 신자들이 S마트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누군가의 가벼운 말이 맘카페를 통해 퍼지며 소문이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유제품 사건 역시 경찰 조사를 통해 진상이 드러났다. 매장에 경쟁사 직원이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몰래 두고 간 장면이 CCTV에 포착되면서 의도적으로 꾸며진 일이었음이 밝혀졌다.
억울함이 풀리면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나는 쉽게 편안해지지 못했다. 힘든 시기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던 때라 더욱 날 선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 뒤로 한동안 매장을 찾는 고객들의 작은 말과 사소한 행동에도 늘 신경이 쓰였다. 사건의 전말을 마트 앞에 크게 붙여 고객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객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막상 오랜만에 마주한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 고마움과 감동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때 뜻밖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지 않는 고객이라 하더라도, 한때 우리 S마트를 찾았던 모든 고객들이 다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주변에 많은 마트 중 S마트를 찾아줬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한 번이라도 마트에 발걸음 했던 이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게 됐다.
결혼 후, 이별 노래는 더 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아 듣지 않게 됐다. 그러다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이별노래를 들으며 나는 떠나간 연인이 아니라 떠나간 고객들이 떠올랐다. 이별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마음의 결은 비슷하다는 생각에 혼자 웃음이 났다. 이별 노래를 들으며, 고객들에게 나쁜 안부만은 끝내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휴대폰 조명을 켜고 무대 위의 가수를 향해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다짐했다. 어떤 고비가 오더라도 날을 세우기보다, 곁에 머물렀던 모든 이들의 안부를 조용히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