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퇴사를 하게 된 가짜 이유

설명이 길어진다는 건 나를 포장하게 된다는 것

by DesignBackstage

뭐야, 무슨 일인데?

집에 무슨 일 있어?

oo 때문에 못 다니겠구나!

참을 만큼 참았네, 돌아 버릴 거 같은 거야?

인사팀에 가서 싹 다 불어버리지!

왜 네가 나가는 거야!?


퇴사를 할 거라고 친한 동료들에게 말하니 대부분이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다 부정적인 질문들이었다. 아차차, 기억에 남는 긍정적인 질문도 있었다.

"와 대박, 비트코인 대박 난 거야?"

대부분의 돌아오는 답변들이 부정적이라기보다는 내가 못 버티고 회사를 나가는 상황으로 설정을 하고 묻는 형식이었다 마치 본인들의 추리가 맞았다는 듯이, 대응방안까지 만들어주고 분개해주는 모습이라니 너무 고마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이 속상했다.


식자재 유통업을 하는 가족사업을 함께 하기로 했다. 온라인 사업으로 비즈니스 방향을 틀어야 하는 시기에 내가 했던 업무들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가족사업을 함께 해야 함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회사생활의 익숙함과 인정받는 순간들 속에서 커지는 충성심, 회사의 이름을 통해 받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들, 그 외의 다양한 복지 등 많은 부분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사실 이것도 좀 포장이 된 부분이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동안 열심히 해오신 사업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고 사실 내가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대기업이라는 명함 한 장에 대한 알 수 없는 든든함도 포기하기가 쉽진 않았다.

명함 한 장에 새겨진 모두가 아는 회사 이름은 굳이 어떤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아도 그 규모와 사회적인 지위 정도가 가늠이 되었다. 하지만 크지 않은 가족 사업체가 새겨진 명함을 내밀면 일단 무엇을 하는 회사고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일이 설명해야만 한다.

또한 사회적인 지위 또한 가늠이 되지 않기에 어느 정도의 매출과 규모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물음을 당하기 부지기수다. 당장 가족사업의 사활이 걸린 수많은 업무 한가운데서 이런 내 위주의 극 개인주의적 발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나 수치스러웠지만 명함 한 장으로 수많은 교류와 업무를 해온 나로서는 가장 먼저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여하간 회사를 왜 그만두느냐는 질문에 주변 동료들에게 답을 해주어야 했고, 최대한 있어 보이게 포장하여 퇴사의 순간을 좀 아름다운 퇴장으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오피셜 한 퇴사 이유를 정했다.


온라인 비즈니스 사업 확대를 위한 가족사업의 동참하기 위해 14년간의 회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동안 회사에서 배우고 터득한 리서치 업무와 홍보실력들을 잘 활용하고 회사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렇게 딱 정리해서 수많은 질문들에 통일성 있는 제스처로 전달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쉽지만 행복을 위해 보내준다며 슬픔과 위로,
기쁨과 부러움 등 다양한 자세로 배웅을 해주었다. 인사팀은 호시탐탐 혹시나 경쟁사로의 이직을 위한 연막전이 아닌지 예의 주시했고, 팀장 또한 내가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닌지 수많은 면담을 통해 내게 거드름을 비우곤 했다.


아니 그동안 업무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화하고 애정도 있었으면서 갑자기 이 바닥을 떠난다고?

난 다른데 이직을 하거나 관련 사업체를 차린다거나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도통 이해가 안 되네, 이쪽일 계속할 생각 아니었어? 끝까지 나를 떠보기 위한 인사팀과의 합동작전이 펼쳐졌다. 말이라는 게 결국 뉘앙스나 대화의 목적이 중요하기에 나는 그 질문들이 나를 걱정하는 달가운 말들로 들리진 않았다.


그간의 그의 행태로 보아왔을 때, 같은 산업군에서 나를 절대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간다 한들 내가 절대 곱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명확한 뉘앙스가 온몸을 적셨다.

퇴사를 하겠다는 마당에 응원 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저렇게 찬물을 끼얹어버리니 정신이 번쩍 났다.

그는 나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기라도 하는 듯 꼬치꼬치 물어보다가, 이 정도 회사에서 이런 일을 무려 내 밑에서 일을 하는데 왜 퇴사하려는지 도대체 의문이라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진짜 네 계획이 뭐야?

라는 똑같은 질문을 연신해댔다. 네가 뭐할지 들어보고 나도 내 앞길에 대한 힌트를 좀 얻어볼게 라는 식의 모호하고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연신 나를 바라보았다.


준비했던 아름다운 퇴장을 위한 나의 오피셜 한 퇴사 이유를 우아하게 읊조려 봤지만, 도대체가 도통 알아듣지도 못하고, 사람을 끝없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실은 그와 더 이상 밀폐된 공간에서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너무나도 소모적으로 느껴져서 말을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마디로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다.


고구마 감자 팔러 퇴사한다고요!


뭐든지 그렇다. 길게 설명하면 할수록 자꾸 나를 포장하게 되고, 포장하다 보면 수많은 포장지가 덮어져서 정말 무엇을 포장했는지 모르게 되곤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황에서도 이런 일들이 빈번해진다. 사람과의 관계, 업무를 진행하는 프로젝트,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의 선택 모든 것에 있어서 말이다. 일정분야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고 소위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많은 이들의 기업철학에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메시지들이 항상 적용되는 것을 보면 가끔 삶의 브레이크를 걸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의 14년간의 퇴사는 이렇게 오피셜 하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내 퇴사의 진짜 이유는 좀 더 복잡하고, 계산적이며,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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