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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팅달 Jan 22. 2022

051 엄마가 키워준 손녀의 믿음

레위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출애굽기 4:14-15)


박에스더 박사님은 한국인 최초의 여성 양의사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그런데 박사님이 의사가 된 것은 남편 박유산의 헌신적인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사님과 박유산은 한국에 온 선교사님들의 의료선교를 돕던 중, 두 사람이 모두 공부하기에는 재정이 빠듯했다.


이에 박유산은 자신보다 뛰어나고 학업에 대한 열의도 컸던 박사님을 외조하기로 마음 먹었다. 박유산은 학업을 포기한 채 농장에서 일하며 박사님을 뒷바라지를 했다.


1900년 6월 박에스더 박사님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런데 박사님의 졸업식에 박유산은 참석하기 못했다.

애석하게도 같은 해 4월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인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죽임이었지만 박유산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의사가 된 박에스더 박사님은 귀국해 의료와 교육 사업에 힘쓰며 사회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모세의 형 아론을 모세의 조력자로 세워주셨다.

이후 모세는 아론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루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모두에게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훌륭한 조력자를 만나게 되길. 아울러 우리가 그러한 조력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감사 QT 365> 중에서


김점동(박에스더 1877-1910)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미국 볼티모어 의과대학 최연소 입학자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치른 부부이기도 하다. 김점동은 10살 때 이화학당에 입학했고, 12살 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 '에스더'라는 이름을 받았다.('박'은 결혼 후 따른 남편의 성)영어를 잘했던 에스더는 보구녀관(이화병원)에서 의사들의 통역을 맡았고, 의사의 꿈을 가진다. 1893년, 선교사들의 소개로 박유산과 결혼하고 유학을 간다. 낯선 외국에서 부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2번이나 아이를 가졌지만 조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박유산은 공부하는 아내를 뒷바라지했고, 1900년 박에스더는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나, 남편 박유산은 아내의 졸업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했다. 졸업 직후 박에스더는 한국으로 귀국하여 10년 동안 뛰어난 외과의술로 많은 여성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러다 35세 과로에 결핵까지 겹쳐 결국 천국에 갔다.      



자료출처: 이화여고 이화학사 김점동관


한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선, 그를 돕는 헌신자가 반드시 있다고 본다.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여튼 사람은 혼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 10년 정도는 사회적인 제도로 남편에게 육아휴직도 주면서 인식도 많이 좋아졌지만..

내가 딸을 키울 땐, 아내에게 큰 부담이 됐다.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친정엄마의 도움이 절실했다.

헌신스런 엄마의 기도와 육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딸이 믿음안에서 올바르게 크지 못했을 것 같다. (감사해요 엄마)


"00(손녀딸)좀 데리고 가라. 내가 깔고 누워서 위험해"


생사의 강을 왔다갔다할때도,

또는 컨디션이 안좋을때 섬망증세를 보이실때 하시는 말씀이다.

나이 많은 할머니가 손녀를 업어서 키웠는데, 그 때의 기억 때문인지 자꾸 손녀이름을 부르면서 등에서 빼달라는 것이다. 욕창방지 베개가 부드러운 실리콘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엄마의 생각엔 등에 손녀딸이 있다고 느껴진단다. 가끔 못움직이는 왼쪽팔도 손녀딸이라고 생각 하신다.


"엄마, 손녀는 키가 170이 넘는 엄마보다 훨씬 큰 어른이됐어~ 아가가 아니야~"

"그래 그래 나도 아는데, 자꾸 어린 00가 등 뒤에 있는 거 같어."


그 손녀가 이젠 다 커서 어엿한 여고생이 됐다. 엄마가 손녀를 엄청 자랑스러워하셨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 다니는 학교에 입학을 했을때였다.

전통이 있는 학교라서 엄마의 친구들도 이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했다. 그 친구가 엄청 부러우셨다고. 그치만 손녀가 이 학교를 다니니 소원을 풀었다면서 엄청 좋아하셨었다.

딸이 주일에 기숙사를 들어가기 때문에 , 코로나 시기이지만 잠깐 학교 구경을 할 수 있어서 가을밤 엄마아빠를 모시고 학교 구경을 한 적이 있다. 운치있는 학교 분위기에

우릴 따라오는 들고양이. 웃고 떠든 기분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학교엔 유관순기념관, 김점동관, 심슨기념관, 스트랜튼관 등 어디서 들어본 이름들이 건물에 붙어 있었다.

그 중 기숙사의 이름이 바로 김점동관이다. 시설도 좋고, 사감선생님도 좋고, 룸메를 짝지어줄때도 세심하게 신경써 주는 것도 좋기 때문에 학생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엄마의 희생과 헌신때문에 나도 내 딸도 믿음과 기도로 잘 자랄수 있었다. 이제 좀 살만 하니까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리니... 더 잘할 걸... 이란 후회만 남는다.

하지만 엄마의 재활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으니... 희망이생긴다~


엄마. 꼭 일어나셔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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