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2)
한경직 목사님은 영락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실 때
젊은인들을 위한 교육 사업과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위한 구제 사업에 힘쓰셨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으셨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책을 쓰시라고 권했지만
라고 말씀하시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그런데 80세가 되셨을무렵 다른 책은 못 써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은 남겨야겠다고 하시며 책을 쓰셨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감사>다.
이 책에서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을 앞두고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할 말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감사밖에 없다.라는 고백이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을 것이다.
<감사로 시작하는 365> 중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 떨어져 심한 부상을 입어, 한 참을 병상에 계시다가 소천하신 엄마의 친구분이 계셨다. 나이가 들면 다리에 근육이 빠져서 걷는 것이 힘드신 모양이다. 그분은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셨고, 영락교회 권사님이시기도 했다.
생전에 한경직 목사님을 굉장히 존경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한 번만 같이 예배드리자고 하셨단다.
휠체어를 타고 강단에 서신 한 목사님을 뵌 적이 있다면서, 말씀이 좋았다고 하셨다.
한경직 목사님은 기독교에서는 매우 유명하며, 존경을 받는 분이다.
소천하신 뒤에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를 보니 남한산성 기슭 6평 남짓한 거처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했다. 평생 통장 한 번 만들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한 목사님이 남긴 것은 40여 년 동안 쓴 1인용 침대, 안경, 헤진 양복 몇 벌, 낡은 성경 책이 전부였다는 것.
그의 검소한 인생철학은 지금도 설교 때 많은 목회자들이 인용하고 있다.
그것만 들으면 참 훌륭한 분이다~ 싶은데....
사실... 한 목사님은 역사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은 분이기도 하다.
다행히 돌아가시기 전에 사과를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교회에서는 왜 그런 과오는 말을 해주지 않는지... 뭐 비난받는 말을 해서 좋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알 건 알아야 하지 않나 싶다.
엄마는 말을 조심하라고 하셨지만, 난 교회 식구들에게 얘기한다.
죄도 없이 살육되어간 수많은 영혼들에게 미안하고, 잘못된 이념교육으로 죽을 때까지 몰랐던 서북청년단 원들도 안타깝기도 하고... 이 역사의 한 대목을 알게 된 순간,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역사교육이 중요하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잘 믿을 수 있고, 더 잘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는 떨리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셨다.
엄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초등학교 때 식민교육을 받았고, 청소년 때는 한국전쟁을 겪었다.
참봉이셨던 할아버지. 최 씨 가문이 그 마을을 지배했는데....
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봉건사회에서 살았던 엄마는 가족 같았던 머슴(?)이라 불렸던 분들이 6,25 때 친인척을 살육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셨다. 미군이 들어오니 또 전세가 뒤집혀 감옥에 갇혀 돌아가시고...
엄마는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그 광경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였다.
(아빠는 함경남도 사람인데. 그런 건 참 아이러니함^^)
혼란스러운 미 군정시기와 군사 정권 시대를 지나면서 호남사람이라고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2016년 탄핵 촛불 때,
절대 광화문에 나가지 말라고... 이유는 잡혀간다고 하셨었다.
엄마 마음이 뭔지 안다.
그래도 난 나갔다.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면을 내 딸도 알아야 한다고.
웃으면서 엄마와 전화를 끊었지만, 한 숨이 크게 쉬어졌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 까지. 고생해 준 엄마 아빠의 세대,,,,
특별히 엄마가 왜 젊은 시절에 선교사가 되겠다고 선택했던 과정도...
여러 모로 많은 것들이... 이해하게 된다.
엄마아빠 고생하셨습니다.
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