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리셀라 에스코베도

카를로스 페레스 오소리오 감독. 마리셀라 에스코베도, 세 번의 죽음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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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실의 인물과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되고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각색과 편집이 된 버전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이 믿음이 강해질수록 감정 이입이 쉽고 그만큼 충격과 감동도 커지니까. 강렬한 영상미와 황홀한 스토리텔링에 매료되게 된다. 이걸 현실이라 믿는 순간, 지금 사는 '나'의 인생도 조금은, 지루하지 않게 여길 수 있다. 삶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에 더 몸과 마음이 기운다. 모든 현실을 영화라는 필터로 인지하는 건 위험하지만, '공익'의 목적이 가미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매일 겪는 미디어로는 거리가 느껴지는 이야기들, 어둡고 불편하고 끔찍한 뉴스들, 잘 들어보지 못한 동네에서 발생한 무명의 소시민들에게 발생한 일들, 평소엔 들리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던 내용, 이런 것들을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수면 위로 끄집어낸다. 마치 수장된 시신을 수색과 탐색을 통해 찾아 끌어올리는 잠수부들처럼. 결과물과 마주하면 당연히 경악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장편 영상들이 주던 감흥과 너무 다르고, 무엇보다 환상과 기대의 충족이 아닌, 각색 없는 현실 그대로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써 귀를 막고 있었던 진실, 우리는 이런 다큐멘터리의 속성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제거되었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영화는 (기존의 경험과 다르게) 현실의 편집 버전 아닌 현실 자체가 되어 뇌와 심장을 뒤흔든다.


마리셀라가 운영하는 가구점 점원과 마리셀라의 딸이 눈이 맞는다. 10대에 동거와 결혼, 임신과 출산을 한다. 어느 날, 딸은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불탄 시체로 발견된다. 마리셀라는 범행 현장 주변에서 불탄 딸의 뼛조각을 줍는다. 범인은 딸의 남편, 사위였다. 여성을 죽인 자가 처벌받지 않는 국가, 멕시코. 범인은 자신이 죽였다고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마리셀라는 딸의 인권과 멕시코의 모든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판결에 저항하며 행진을 시작한다. 재판이 재개되지만 범인은 도망친 후였다. 어떤 공권력도 죽은 여성과 그의 어머니를 돕지 않았다. 무능한 대응으로 범인을 놓치기도 했다. 범인은 이후 범죄 조직으로 들어간다. 멕시코 내 어떤 공권력보다 막강한 카르텔 세력이 그의 뒤에 있었다.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마리셀라의 시위는 멈추지 않는다. 새로 선출된 정치인을 지목하며 사건 해결을 촉구한다. 그리고 다음 날 마리셀라는 공공 청사 바로 앞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과거의 스토리텔링 방식이라면 마리셀라가 무엇과 싸웠고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더 부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멕시코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참담한 환경인지 알려줄 뿐이다. 선의의 저항이 얼마나 무력하게 끝나는지. 국가보다 범죄조직이 얼마나 더 강력한 세력인지. 희망을 전도하지 않는다. 희망은 없다고 단언한다. 의미와 교훈, 선한 영향력이 아닌 잔혹한 팩트를 실제 영상 자료들과 함께 전시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속지 않으니까. 팩트보다 강한 자극은 없으니까. 저런 사회에서 여성을 낳고 기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없다. 야만을 원시부족의 식인 문화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남성 중심 국가는 여성을 산채로 육식하며 자신들만의 시스템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그들에게 엄마의 성별은 의미가 없다. 남성보다 손쉬운 착취와 폭력의 대상일 뿐. 멕시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다른가. 저기보단 낫지 않냐고 생각한다면, 아직 스스로가 한국의 여성 차별 현실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아닌지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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