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캠포스 감독.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옥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흔히 사용되고 연상 이미지 또한 정형화되어 있어서. 내게 지옥의 첫 이미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일부,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죄를 짓고 신의 용서를 받지 않은 자들이 모여 형언하기 힘든 형벌의 고통을 영영 받는 곳이었다. 실제 관련 텍스트와 이미지를 접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이고 당장 죽어도 저기는 가면 안될 텐데... 그렇게 천국은 반사적으로 사후 필수 목적지로 등극했다. 생존 기간이 늘어나고 따라 경험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지면서 지옥의 개념은 확장되었다. 현실의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데 적확한 키워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옥은 현실에서 살아가며 느껴지는 고통과 슬픔의 최대치, 괴로움과 분노의 불멸성을 표현하는데 적당해 보였다. 특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상황, 그럼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함축하는데 그럴듯했다. 어릴 적 그토록 두려워했던 시공간이 타인과 나의 동시대 일상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상상과 허구, 이미지로서의 지옥은 제각각이었지만 물리적으로 와 닿는 지옥의 원천은 하나였다. 물론 이 원천 또한 분석하고 파헤치고 헤집다 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물리적 대상으로서 현실의 지옥은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시작했다. 햇볕, 물, 공기보다 더 가득하게 주변을 뒤덮는 존재들, 인간. 현실 지옥의 원천은 인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지옥을 표현하는데 보다 친근한 매개체가 필요했다. 친밀한 지옥, 익숙한 형태의 지옥, 공감대를 지닌 지옥, 이해의 여지를 지닌 듯한 지옥, 인간적인 지옥, 지옥의 인간화, 인간으로 빙의한 지옥이라는 시공간, 지옥은 그렇게 악마가 되었다. 지옥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악마는 빨리 친해졌다. 악마는 인간을 흉내 낸 형태였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악마를 점점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악마의 극단성에 열광하고 환호했다. 악마와 가까워진 자들은 악마가 되었고 악마를 원하던 자들이 악마가 되었고 악마를 기다리던 자들이 악마가 되었고 악마를 회피하던 자들이 악마가 되었다. 악마를 두려워하고 악마에게서 도망치던 자들마저 악마가 되었다. 그렇게 지옥은 인간계와 지상에 안착했다. 모두가 악마가 되었고 오랜 악마들이 휘젓고 새로운 악마들이 창궐했다. 악마는 유행이 되었고 문화가 되었고 일상이 되었다. 인간과 악마, 일상과 지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성은 무력했다. 인간이 후천적으로 학습한 이성과 도덕률 따위로는 악마의 세력 확장과 지옥의 팽창을 막을 수 없었다. 악은 예술의 경지로 추앙받기도 했다. 죄는 필수품이 되었다. 죄책감은 조미료였다.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악을 향한 충성심 또한 뜨거워졌다. 회개보다 합리화가 더 쉬웠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악마로 타락하는 쾌감이 더 컸다. 공급과 수요는 뒤집혔다. 지옥의 인간화보다 인간의 지옥화가 더 거세졌다. 의인화를 거친 악마는 신격화되었고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교회는 십자가가 무색하게 악마의 침실이 되었다. 더 많은 지옥의 프랜차이즈 본사가 되었다. 몰려든 죄인들은 회개 대신 악마가 되기를 택했다. 앞에 선자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아멘으로 화답하면 그만이었다. 맹목적인 아멘이 늘어갈 때마다 죄 없는 죄인들이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구원 마케팅은 대성공이었다.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모델을 내세운 전략은 지옥불에서도 천국이라는 허상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지옥의 영업사원이었고 악마를 자처했으며 고뇌하는 자들은 광장에서 처단했다. 심판은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으로 불타 없어졌다는 에피소드는 조작 아니었을까. 지상 모든 곳이 소돔과 고모라였다. 도망치려던 자들은 모두 소금기둥이 되었다. 악마가 된 인간들과 악마가 되어가는 인간들이 불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알빈(톰 홀랜드)은 악마가 되지 못한 채 혼란과 혼돈 속에서 수많은 악마들을 살해한다. 다음 목적지는 없었다. 죽을 듯한 피로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어 지옥에 간들 현실의 이곳보다 포근할 것 같았다. 엄마(헤일리 베넷)와 아빠(빌 스카스가드)를 만날 수 있을까. 여동생(엘리자 스캔런)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런 곳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