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넷, 무지와 희생의 공존 속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테넷

by 백승권

평행이론에서 의식과 다중 현실의 관계 구분은 불가능해


개념이 이해 안 되면 헬기에 타지 마


시간과 돈을 맞바꾸고 우리의 미래를 팔았지


내가 끝낼 세상에 자식을 낳은 게 죄지


알고리즘을 이용하려는 미래 세력은 존재해



함께 목숨 걸던 모두가 죽고 홀로 살아남았다. 홀로 살아남는 과정 또한 죽기보다 고통스러웠다. 죽음이 고통의 끝이라면 생존은 죽을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복잡하고 변칙적이며 납득이 불가능했고 받아들여할 뿐이었다. 그(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생니가 모조리 뽑히는 고통 속에서 배신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래서 함께 목숨 걸던 모두와 비슷한 처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죽지 않았다. 약속된 신념을 어기지 않은 대가로 타인의 의지로 살아남았다. 타인은 타인이 아니었지만 이때는 타인의 의지처럼 보였다. 살아남아 이행해야 할 다음 '전략'들이 많았다. 그는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고 새로운 동료들을 만난다. 서로 비밀이 많았고 누가 죽어도 이의가 없는 작전. 그는 시간을 조종하는 힘을 처리해야 했다. 시간은 늘 앞으로 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힘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물리적으로 파괴된 벽이 새로운 힘에 의해 되돌려지면, 현재 파괴된 벽에 있던 사람이 이 되돌려지는 과정에서 그 벽의 구조물 속으로 매몰되게 된다. 방사능이 멸망시킨 땅에서 방사능으로 살아남은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는 이 힘을 통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죽은 후 누구도 이 세상을 가져선 안되니까.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도 가질 수 없다. 사토르는 (자신이 사라진) 미래를 질투한다. 이 질투심으로 자신의 스위치가 꺼지는 동시에 세상도 죽이려 한다.


닐(로버트 패틴슨)은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 조력자를 넘어 계획을 리드한다. 그가 작전을 휘저으며 최악의 상황을 막게 하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서 긴박한 모든 순간을 함께한다. 의심은 신뢰가 되고 신뢰는 희생으로 이어진다. 모두를 위해 한번 죽었던 그는, 자신이 지키려는 미래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닐을 보며 눈물짓는다. 희생은 미션의 최종 단계였다. 닐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였다. 개인의 충동과 감정의 동요가 아닌 미래로부터 이미 정해진 계획의 일부였다. 그가 닐을 보냈다. 그의 모든 조력자는 그의 계획 아래 지정된 역할들의 일부였다. 어떤 팀의 목적은 실패였으며 자신들의 실패를 통해 다른 팀의 승리를 견인해야 했다. 누구는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보이고 누구는 앞으로 무한 돌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다수의 희생이 더해져 소수를 움직이게 했으며 소수의 힘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어했다.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의 구원자와 미래 지도자가 모두 백인 남성 중심이라는 점에서 테넷의 그는 다른 상징성과 존재감을 지닌다. (자신들을 세상의 핵심으로 여기는 보수 백인에게는 전복적이기까지 한) 흑인이라는 인류의 다른 종이 다른 위기에 다른 대응함으로써 새로운 인류 구원 서사를 제시한다.


테넷은 세기말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작동되는 방식의 평온한 풍경을 강조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언제나처럼 표면적인 고요를 유지한다. 이건 결코 사건사고의 발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을 저지하기 위한 수많은 요소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누군가 알아주고 이런 결과에 경탄하며 수고를 치하하는가? 그런 일은 없다.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아무도 여기에 의견과 감정을 담지 않는다. 무심과 무지에 가깝다. 그렇다고 위기와 위협이 속도를 늦추는가. 그럴 리 없다. 최악의 위기는 (나없을 세상의) 고요를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모든 디테일을 조종하려 한다. 막지 않으면 인류는 전멸한다. 전멸 이후의 세상과 시간은 의미가 없다. 미래의 지도자는 이런 무의미를 막기 위해 시나리오를 짠다. 최고의 동료를 미래에서 현재로 보낸다. 현재의 자신과 만나 현재의 악에 대항하고 섬세한 우정으로 세상을 구한다. 세상의 깊고 긴 침묵은 언젠가 직면할 거대한 위기를 품고 있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는 대신 목숨을 던지고 목숨을 건진 대다수는 아무도 모른다. 무지와 희생의 공존을 통해 세상은 기이한 균형을 유지한다. P.S 혹시 사토르가 캣(엘리자베스 데비키)의 아들의 미래는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사토르의 젊은 날에 대한 회상은 현재 시점에서 방사능으로 망한 미래는 아니었을까 하는.


*다시 보니 닐이 캣의 아들일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 그가 캣과 캣의 아들을 살렸고 성장한 캣의 아들이 그에게 은혜를 갚는 맥락이라면 이해가 간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테넷과 오펜하이머의 세계관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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