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티드 버드, 전쟁은 약자부터 불태운다

바츨라프 마르호울 감독. 페인티드 버드

by 백승권

전쟁은 공공의 적을 선언한다. 그 안의 모든 개인들은 적을 판별하기 시작한다. 살기 위해, 죽이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전시 살인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죽인 자들만 남는다. 죽인 자들이 남아 남은 자들 중에 죽을 자를 선정한다. 이를 피하는 방법은 발명되지 않았다. 그토록 모든 곳을 폐허로 만들고 모두를 말살시켰어도 인류는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기술보다 죽이는 기술을 더 잘 알고 있다.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을 죽이는 기술까지 끊임없는 연구와 시행착오를 통해 진화시키고 있다. 조상들도 그렇게 살아서 후손인 우리도 서로를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대전제가 어디에 깔려 있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전시 중에 일어나는 살인 행위는 다양한 명분을 갖추고 있다.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말은 얼마나 가해자 중심인가. 죽이는 사람이 있기에 죽는 사람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름 없는 소년(페트르 코틀라르)은 처음부터 버려진다. 전시 상황에서 가장 죽기 좋은 조건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동유럽, 소년은 다르다는 이유로 무리들에게 잔혹한 폭력의 대상이 된다. 넌 유대인이야. 품에 안던 강아지가 불탄다. 넌 유대인이야. 냉정했지만 맡아주었던 아주머니가 앉은 채 숨을 거둔다. 넌 유대인이야. 소년은 거구의 성인들에게 둘러싸여 다시 온몸이 짓이겨진다. 넌 유대인이야. 소년은 강물을 따라 주검처럼 떠내려온다. 소년을 구한 남자는 질투에 눈먼 노인에게 두 눈을 잃는다. 넌 유대인이야. 적군에게 총살의 위기에 처한다. 넌 유대인이야. 성당을 다니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넌 유대인이야. 거둬준 노인의 자살을 돕는다. 넌 유대인이야. 넌 겨우 꼬마지만 넌 유대인이야. 소년은 살아남는다. 애걸복걸하며 살아남고, 도망쳐서 살아남고, 살려줘서 살아남는다. 남들은 수백 번 죽었을 위기에서 소년은 원했던 그렇지 않았던 살아남는다. 살아남으며 키가 자라고 몇 가지 기술을 익힌다. 살기 위해 해야 할 것들에 길들여진다. 시체의 신발을 벗겨 자신의 발을 감싸고, 남을 때려 식량을 빼앗고, 넌 유대인이야, 나를 끔찍한 폭력에 몰아넣은 자를 굶주린 쥐떼의 소굴로 몰아넣고, 넌 유대인이야, 나를 피 흘리게 자의 심장에 총알을 박는다.


다른 새가 되고 싶어서 다른 새가 된 게 아닌데, 소년은 다른 색이 칠해진 새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무리와 타인에게 끝없는 경멸과 배척, 폭행과 고문을 당한다. 부모가 없었고 나라도 없었고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은 정체성이 없었고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어디 출신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즉살 대상이었다. 소년처럼 수많은 약자들이, 아이와 엄마들, 노인과 소녀들이 다르고 약한 것은 죽여도 된다는 신념에 절여진 자들에 의해 죽고 죽었다. 지옥도 소스라칠 악전고투 속에서 짐승과 악귀가 아닌 사람도 만나긴 했지만 그들 역시 각자의 고통 속에서 죽거나 사라졌다. 죽음 이후엔 알 수 없고 사는 내내 고통이라면, 소년에게 죽음은 삶보다 사소했다. 죽음은 모호했지만 삶보다 공포스럽진 않았다. 모든 곳에서 도망치고 모든 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 계속 다른 소년이 되어야 했고, 다른 역할을 해야 했으며, 다른 방식으로 육체를 끌고 가야 했다. 신이 소년의 삶에 개입한 결과가 이런 거라면 신은 사디스트가 맞다. 이것이 인간계에 태어나서 치러야 할 대가라면 인간의 탄생은 소멸에 대비한 권장이 아닌 원천 봉쇄해야 할 금기에 가깝다. 소년은 남은 삶 동안 과연 얼마나 더 죽고 죽이게 될까. 평생 세뇌당한 폭력을 다른 약자에게 저지르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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