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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21. 2021

제미니 맨, 인간은 복제할 가치가 없다

이안 감독. 제미니 맨



두 개 대륙을 오가며

자기 자신에게 얻어터지다니,

대단하네



윌 스미스가 윌 스미스와 싸운다.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과 싸우는 존재지만 이걸 내면의 분투가 아닌 오프라인의 실물 격투로 보니 이물감이 상당하다. 네가... 나구나... 이 눈빛 이 근육 이 움직임... (만지작만지작) 이럴 시간이 없다. 원본 윌 스미스가 킬러계의 탑티어라서 당연히 복제품의 퀄리티도 매우 우수하다. 인간적인 심리 갈등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제작자(클라이브 오웬)가 어릴 적부터 어울리지도 않는 아빠 노릇하며 신경 쓰지만 가능할 리 없다. 뇌를 복제하면 정신도 복제하는 건가. 뇌를 복제하긴 한 건가. 슈퍼 군인을 복제하면 슈퍼 군인이 나오는 건가. 슈퍼 돼지를 복제하면 슈퍼 삼겹살을 얻을 수 있겠지만 실력 좋은 슈퍼 군인을 복제하면 같은 실력의 군인을 생산할 수 있는 건가. 그렇게만 되면 캡틴 아메리카나 윈터 솔저 한 명 잘 키워서 천명 만명 만들면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게 아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남자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을 때 발생하는 깊고 푸른 열망을 강렬하게 그렸던 이안 감독은 제미니 맨을 통해 나이 든 남자가 나이 어린 자신을 동시간대에 만났을 때 발생하는 격렬한 전투를 연출한다. 히스 레저와 제이크 질렌홀 대신 윌 스미스 두 명이 자리 잡는다. 007과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끝내주게 잘했던 오토바이 추격 액션과 콜 오브 듀티 같은 특수 부대 총격 장면을 비중 있게 채우지만 두 명의 윌 스미스는 눈빛부터 표정까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백인 남자가 흑인 남자의 능력과 외모를 복제해 키워 자신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는 설정부터 기묘했다. 흑인 복제품과 백인 창조주, 그리고 아무 역할도 없는 백인 여자까지. 인간 복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과감하게 제거했지만 긴장감마저 같이 사라졌다. 죽은 군인을 기술로 부활시키는 수십 년 전 설정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미스는 주니어를 통해  스미스 주니어를 만난다. 자신 또는 유사 아들, 그렇게 불멸의 희망을 얻는다. 혼란이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새로운 변화이자 거부할  없는 미래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듯이 수긍한다. 하지만   명의 군인이 달려온다. 연쇄 폭발로 온몸이 불타오르며 달려온다.  스미스와  스미스 주니어는 당황한다.   명의  스미스 주니어가 죽어가고 있었다. 이걸 전장의 스케일로 확장한다면 수천수만의  스미스 주니어들이 윌스미스 주니어의 시체가 쌓인 도심에서 세계 시민을 무차별 학살할 수도 있는 셈이었다.  남성 백인들은  어렵게 군대를 만들어 세계 정복 같은  꿈꿀까. 욕망의 실현을 최종 목적으로   거기에 수반되는 시간과 노력을   효율적으로 재구성/재구상해야  때도 되지 않았나. 복제인간을 마주하는 순간 원본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원본이 사라진  불완전한 복제인간은 여전히 세상을 휘저을 거라서. 불멸의 생은 영원히 추구하려는 능력 있는 소수와 이를 지원하는 다수의 염원이겠지만 복제 이전에 원본의 투입 적합성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수한 극소수 경우를 제외하고) 불완전을 복제하여  다른 불완전을 생산하는  복제하지 않는 것보다 과연 이로운가.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장기적 매출과 영업이익 달성을 위해 정녕 옳은 선택과 결정인가. 영화 제미니 맨은 원본 인간과 복제 인간의 긴장감 없는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며 고개를 절레절레하게 만든다. (세상에 널리 전파되기 위해) 복제할 가치가 있는 원본은 많지만 인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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