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영원한 저항

이준익 감독. 동주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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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아니었다.

시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시집을 내기 전까지

윤동주에게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집을 내고 난 후

윤동주는 시인으로 '활동'하지 못 했다.

일제 치하였고

붙잡혀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어

알 수 없는 약물을 투여받고

형사에게 고초 당하다 죽는다.

만 스물 일곱이었다.

윤동주는 이 글을 적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살다 떠났다.

지금의 나와 다른 삶이었고

당시엔 비슷한 젊음이 많았다.

따분한 위인전 같을 줄 알았던

흑백영화는 그렇게 명징한 울림이 되었다.

다른 시대 다른 상황 다른 젊음

얼마나 다를까 싶지만

다시 태어나도 나는 그들과

비슷하게 조차 살지 못할 것이다.

조국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 되는 시절이었다.

윤동주(강하늘)는 송몽규(박정민)는

같은 목적으로 두고

서로 다른 길을 간다.

같지만 다른 길

다르지만 결국 같은 길

송몽규는 민중의 피를 끓게 하고

윤동주는 더 많은 다수의 심금을 울린다.

감정적인 파고가 지배세력을 불편하게 만든다.

송몽규는 쫓기고 윤동주는 잡힌다.

일본에겐 일본의 당위와 명분이 있었고

조선에겐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다.

조선의 건장한 인간들은 실험체가 되어 버려졌고

송몽규와 윤동주 또한 다르지 않았다.

역사적 팩트는, 죽음은 그러하지만

영화가 아름다운 건 거기에 다다르기 이전의

둘의 빛나는 모습들 때문이었다.

시와 산문.

인정받지 못한 자와 먼저 이름을 알린 자.

무시당하는 자와 이끄는 자.

싸우지만 떨어질 수 없고,

의견이 다를지 언정 다른 길을 가지 않는 사이.

윤동주는 제대로 서기도 어려운 시절에

나약한 펜을 들어 밤을 깨우는 시를 적는다.

개인을 나약한 감상에 젖게 한다는

핀잔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는 그렇기에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고

조용히 저항한다.

그렇게 책이 되기 전까지

시는 윤동주의 손끝에서 불꽃을 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윤동주라는 숙주를 통해서

윤동주의 시는 어두운 시절로 내뱉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시대는 내내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르므로.

시를 쓰는 자와

시를 읽는 자와

시를 알아봐 주는 자가 있어야

시집은 완결된다.

쓰는 능력과 읽는 능력과 알아보는 능력은 서로 달라

한 축만 미약해도 시는 책이 되지 못한다.

짧은 생이었지만, 윤동주의 주변엔 다행히

시를 책으로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를 쓰는 것조차 부끄럽게 만드는 시절에서

윤동주의 몸은 사망했고

윤동주의 시는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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