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자산어보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둘의 길은 극과 극이었다. 밖에서 끝으로 들어온 약전(설경구)과 끝에서 밖으로 나아가려는 창대(변요한)의 충돌은 예정되어 있었다. 약전은 높은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시대의 저항에 막혀 내려온 자였고 창대는 사방이 막힌 곳에서 한없이 갈망하다가 약전을 만난 후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다만 둘의 시작점이 달라 각자의 새로운 세상은 달랐다. 스승 약전이 아무리 이야기한들 창대에겐 들리지 않았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벽에 부딪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다. 창대는 공부를 하고 벼슬을 얻고 임금을 만나 백성의 열악한 처지를 바꾸고자 하는 이상이 있었다. 임금에게 자신의 뜻이 가닿아야 백성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계획이 있었다. 논리적이었고 공익적이었으며 아름다운 꿈이었다. 약전은 그 꿈을 반대한 게 아니었다. 다만 약전은 임금의 곁에 오래 있던 자였고 임금 곁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으며 정중앙에서 모진 풍파를 모조리 겪은 자였다. 약전의 꿈은 임금을 바꾸는 게 백성을 바꾸는 게 아니었다. 약전의 꿈은 시스템의 교체였다. 임금과 백성이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리는 나라가 약전의 꿈이었다. 약전의 꿈은 창대의 꿈이 지닌 한계를 몸으로 경험한 후 깨닫게 된 새로운 이상이었다.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는 약전이 꿈꾼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약전과 창대의 세상은 달랐다. 창대는 약전의 꿈을 듣고 귀를 의심한다. 임금이 필요 없는 나라라니. 역모의 꿈이었다. 자신의 스승이 역모를 꿈꾸는 자라니. 창대는 생경했고 두려웠으며 경계했다. 둘의 길은 거기서 쪼개진다. 창대는 자신이 맑은 윗물이 되어 아랫물도 맑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위해 스승 약전과 함께 알껍질을 깨는 힘을 길렀다.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홀로 나아갔다. 자신의 힘으로 직접 세상을 바꾸기 위해. 죽은 자와 핏덩이에게도 세금을 물리고 살림살이를 다 빼앗아가는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창대는 최초의 타협과 최초의 시도를 갱신해 나아간다. 윗물이 되어간다. 거기서 걸음을 멈춘다. 창대가 임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지나쳐야 할 관문은 지성과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백성들의 피와 살과 뼈를 쪽쪽 빨아먹어야 가능했다. 죽은 자와 핏덩이에게 세금을 물리고 살림살이를 다 빼앗는 자들과 함께해야 했다. 창대는 글로 배운 세상과 몸으로 배운 세상의 차이를 깨닫고 있었다. 약전의 과거가 창대의 현재였다. 약전의 한계가 창대의 한계가 되는 순간이었다. 창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순교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만인의 영웅이 되기 위해 가족을 버리는 파렴치한이 될 수는 없었다. 창대는 다시 배를 타고 밖에서 끝으로 돌아온다. 마주할 용기는 없었지만 스승이 그리웠을 것이다. 얼마나 나눌 말들이 많았을까. 다른 방향이라 여겼지만 결국 같은 꿈이었다는 걸 공감하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할까. 창대는 때를 적당히 묻힌 어른이 되어 약전을 찾았고 그곳에 약전은 없었다. 남은 세상은 이제 창대와 창대의 다음 세대가 만들어야 했다. 자산어보는 서로 다른 세대가 만나 같은 꿈을 꾸는 과정을 보여준다. 죽는 순서가 달라도 꿈은 사라질 수 없음을 표현한다. 현재의 우리는 몇몇 현자들의 꿈이 실현된 세상을 살고 있다. 다음 세대도 그럴 수 있을까.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는 그런 나라를 꿈꾸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