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를 견디는 삶,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감독. 노매드랜드

by 백승권

고립은 고요를 동반한다. 아무도 없다.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일도 줄어든다. 두 사람이 만든 세계에 살다가 한 사람이 사라지면 세계는 같이 사라진다. 남은 한 사람은 두 사람이 만들었던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물리적인 공간 밖으로 당장 뛰쳐나갈 수도 없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상실과 충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거나 쉽게 적응할 수 없다. 자연스러움이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표현일까. 두 사람이 함께 살다가 한 사람이 떨어져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면 그걸 인정하기도 인정하지 않기도 힘들다면 그 세계는 회복되지 못한다. 남은 한 사람은 회복되지 못한다. 남은 인생은 멀쩡할 수 없다. 영영 불구가 되어 불특정 한 남은 시공간을 견뎌야 한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집이라고 부른다. 다수가 칭송하는 완전한 세계의 이름. 안정과 정착의 상징. 물리적으로 여기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합의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믿고 싶게 만드는 허구적인 공간.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은 고립을 자처한다. 과거로부터 분리된다. 새로운 집에서 먹고 자고 움직이고 돈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전전한다. 펀의 고립은 순수 의지가 아니었다. 고립은 사형 선고처럼 닥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둘의 세계는 둘의 집은 둘의 시간은 붕괴된다. 펀의 삶을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다. 펀은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긴 시간을 보내고 기억만 지닌 채 과거를 등졌다. 차를 몰고 과거로부터 도망쳤다.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움직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시동을 걸기 위해 차를 고쳐야 했다. 도움을 받기 위해 비슷한 무리들 속에 섞여야 했다. 괜찮은 척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대화가 시작되고 나눌 수 있었고 거기서 내 걸 조금이라도 취할 수 있었다. 무참히 죽으려고 도망친 게 아니었으니까. 붕괴된 둘의 세계에 정신을 저당 잡혔지만 홀로 남은 현생에서 분투하기 위해서라도, 그리워할 권리라도 누리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으로 괜찮아야 했다.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바람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공간에서 자고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먹을 것이 있는 곳에서 줄을 서고 말하는 법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야 했다. 내키지 않아도 같이 일하고 비굴하게 느껴져도 이웃의 단잠을 깨워야 했다. 침실과 화장실, 사색에 빠지고 끼니를 때우고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공간 사이에 벽은 없었다. 최소한의 삶은 기존이나 평균보다 다를 뿐이었지 시시 때때 자멸적 우울에 빠질 수준은 아니었다. 펀은 괜찮았다. 괜찮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며 노력했으니까. 혼자된 펀이 자기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모두가 펀을 혼자 두려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펀은 겸손히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혼자만의 길을 운전해 나아간다. 머무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더해지는 게 있다면 덜어내야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몸이 편해지다면 고인이 된 파트너에게 미안해질까 봐 그랬을까. 대지부터 차 안까지 어둠이 덮치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사진을 꺼내면 메마른 얼굴 위로 눈물이 반짝거렸다. 펀은 한때 혼자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꿋꿋이 혼자로 나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별로 뒤덮인 대지 위에서 장작의 불꽃 위로 지인들의 마지막 인사가 내려올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떠난 사랑과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에게서 떠나는 연습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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