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평화에 대하여

by Glenn

뭔가를 심각하게 잊었거나 모르고 있으니까 가능한 건 아닌지 경계한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평화로운 날. 주변의 모든 전쟁이 끝나거나 관계의 긴 오해와 적대가 막을 내린 날이 아니다. 긴장이 평소보다 누그러진 날이다. 아내가 고른 집에서 조금 먼 곳에서 아내와 도로시, 우리 셋은 오래 기억에 남을 브런치를 먹었다. 나가면서 커피도 한잔 더 주문했다. 자리를 이동해 광활한 달리기 트랙과 축구장, 농구장이 있는 공원에서 줄넘기와 공놀이를 했다. 햇볕은 밝고 강했고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도로시와 아내, 나, 우리 셋은 수년 전 산 작은 축구공을 가지고 인파와 바람 사이를 가르며 서로를 향해 힘껏 차고 또 찼다. 혼자 또는 여럿이 운동할 목적으로 같은 곳을 찾은 주변인들의 표정엔 어둠이 옅고 가벼웠다. 우리는 두어 시간 뛰어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다시 몇 권 더 가져왔다. 바코드를 인식하는 무인반납대출기의 불빛 사이로 사이로 류이치 사카모토, 최승자, 안녕달, 허수경, 박준의 이름이 오고 갔다. 부모님들과 통화했다. 시댁 친정 부모님들 모두 각자의 사유로 몸상태가 온전치 않으신데 최근 대부분 고비를 넘기시고 안정적이라는 판단을 담당의에게 받아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결과에만 반응했지만 아내는 모든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다. 검사결과가 안 좋았다면 오늘 같은 안도는 없었다. 다행이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만약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온다면) 주변의 정신적 시간적 육체적 피해와 피로를 줄이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럴 수 있을까. 일부 일본인들처럼 '증발'한다면 나만 그저 이기적 단절 안에서 비겁하게 숨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감당하기 힘든 풍경 속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미성숙한 판단이 담긴 상상에 빠진다. 두려움은 죄가 아니지만 회피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지금 이건 쓰다가 따라오는 생각이고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는 오늘이 참 다른 날보다 평화롭다는 생각에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도로시와 아내와 하루종일 같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평일엔 그러지 못하니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두 달을 끌어오던 거래를 마친 이유도 오늘의 기분에 작용한 것 같다. 아까는 업무 상 틈을 내 단편 소설을 읽었고 리뷰를 쓰면서 예정보다 일찍 마무리했다. 거미줄에 걸린 이슬처럼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상에 각자의 컬러로 걸려 있고 이것들의 총합에서 균형과 평화를 느끼는 일은 한해에 하루도 드물다. 오늘이 그 드문 날인 것이다. 뭔가를 심각하게 잊었거나 모르고 있으니까 가능한 건 아닌지 경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