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을 거야

티 웨스트 감독. 펄

by 백승권

너무 오랫동안 농장에만 갇혀 있어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까 봐 가끔 걱정돼요


사랑해요, 아빠

근데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엄마는 왜 날 미워해요?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을 거야

난 네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있거든

결혼한 남자 코 닦이고 먹이는 데 삶을 다 쓰는 내게

감히 거기 앉아서 후회라는 단어를 논해?


요새는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죠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남들은 다 가진 뭔가가 내 속엔 없는 것 같아요


난 실패작이야


난 그저 사랑받고 싶었어



펄(미아 고스)은 시골 아주 먼 외딴곳에 살고 있는 여성이다.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참전했고 아빠는 전염병에 걸려 시체와 다름없으며 엄마는 낮에는 악마처럼 굴고 밤에는 혼자 엉엉 운다. 펄은 이런 상황이 전혀 괜찮지 않다.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펄에겐 찬란한 꿈이 있다. 바로 댄서가 되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것이다. 펄은 이 꿈을 오랫동안 간직하며 외양간에서 홀로 춤을 춘다. 언젠가 나갈 오디션을 준비하며. 엄마는 알고 있다. 펄이 무엇을 원하는지. 하지만 혹시라도 펄이 나가면 병든 남편을 혼자 돌봐야 한다. 이러려고 결혼한 게 아닌데. 펄의 엄마도 엄마와 아내로만 살다 죽으려고 가정을 꾸린 게 아닌데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펄을 압박한다. 주제를 알라고. 펄은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분노를 삭인다. 농기구의 날카로운 끝으로 작은 동물의 몸통을 쑤셔가며.


펄은 사탄의 알을 깨고 나와 인육을 뜯어먹는 마녀가 아니다. 꿈을 잃는 게 두려운 소녀일 뿐. 하지만 주변의 모든 상황이 펄을 짓누르고 있었다. 펄의 선한 외면을 찢고 벗겨내며 살의를 축적시키고 있었다. 펄은 댄스 공연이 나오는 영화를 몰래 보고 우연히 듣게 된 오디션을 기다린다. 동네 유일의 합격자가 된다면 펄은 전국을 돌며 마음껏 자유로이 춤출 수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 수 있었다. 오디션 당일 펄은 집을 떠날 모든 준비를 하고 심사위원들 앞에 선다. 스스로도 감탄할 정도로 혼연일체의 최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제 만장일치의 합격 결과를 듣고 이 미쳐버릴 정도로 지긋지긋한 시골집과 엄마아빠를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고 펄은 처음 겪는 종류의 좌절감에 휩싸인다. 이런 충격은 아빠의 병이나 엄마의 구속과는 차원이 달랐다. 펄은 고장 난다. 더 이상 펄은 통제될 수 없었다.


펄은 엄마의 몸을 불태우고 아빠의 숨통을 틀어막고 한때 가까워졌던 남자의 심장을 찌르고 라이벌의 팔다리를 분리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펄은 주저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계획하지 않았지만 감정을 주체 못 하며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옥죄던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제거한 후에도 펄은 그들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아빠에게 사과하고 엄마에게 다가가 안기며 구더기가 들끓는 음식과 함께 성찬을 차린다. 펄은 늘 자신이 벌레와 시체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점이 슬프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펄을 더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혈연에게 간절히 애정과 이해를 바랐지만 돌아오는 건 늘 흉기보다 날카로운 독설과 증오가 서린 눈빛뿐이었다. 참전으로 인해 결혼 생활마저 분쇄되었다. 남편이 전장에서 적들을 살육하고 있을 때 펄은 집에서 적들을 살육하고 있었다. 전쟁은 두 곳의 지옥을 남겼고 펄은 한쪽에서 평생 패하고 있다가 최초로 승전하고 있었다. 돌아온 남편은 적인가 아군인가. 그는 아마 높은 확률로 식탁 위 돼지고기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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