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태어난 삶을 되돌릴 수는 없다. 모든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같은 순간은 없다. 수명을 조금 늘리기 위해 몇 가지 의학적 신기술을 적용할 수는 있겠지만 대다수 기존의 삶을 같은 방식으로 이어갈 뿐이다. 제대로 살자. 열심히 살자. 잘 살자. 포기하지 말자. 이런 이야기를 매번 듣고 상기하고 다짐하고 다시 원래대로 산다. 적당한 실패와 적당한 갈등과 적당한 극복과 적당한 불확실, 적당한 인내, 적당한 눈치, 적당한 리듬, 적당한 동선이 무한 반복된다. 적당하다는 건 최선의 평화로움이다. 무리함이 느껴지지 않는 삶이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이전에 이 적당함을 위한 극단적인 고통의 회오리에 휘말렸을 것이다. 망각을 거쳤기 때문에 확신이 아닌 추정할 뿐이다. 사는 건 좀처럼 확신을 가지고 기술하기 힘들다. 그런 척은 할 수 있지만 변동성은 필연이라 늘 무너진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확신은 현재 관점에서 늘 잘 모르고 했던 소리가 된다. 이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길고 적게 있나. 도로시 때문이다. 나의 도로시, 우리의 도로시, 도로시의 세상, 도로시의 우주, 도로시의 시간과 감각과 감정과 보이지 않는 미세한 심연... 늘 미안하지만 문득 더 미안해졌다. 앞서 늘어놓은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 초대해서, 그게 우리라서, 우리 중 한 명이 나라서. 이 글이 어떻게 맺어질지 모르겠다. 늘 미묘한 불안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한계에 대해서 떠올렸고 절대적으로 연결된 도로시의 삶과 그 삶이 당면할 영향을 받을 한계에 대해도 같이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의 한계, 도로시의 한계.
도로시가 얼마나 거대한 우리 삶의 중심이자 전부인지 묘사할 수 없다. 빅뱅이 50억 번 연쇄적으로 일어나도 이 막대한 거대함과 비견하며 설명하기엔 그저 부족하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를 나로 표기한다. 아내는 도로시의 우주를 기획했고 창조했으며 질적 양적으로 팽창시키고 있고 나와 도로시 삶의 신적인 절대자적 존재이자 비중이라서 우리라는 말로 뭉뚱그려 나와 같이 거론될 수 없다. 앞서 우리의 한계라고 표기했지만 결국 나의 한계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우리를 나로 표기한다.) 이런 도로시인데 나와 같이 살고 있다. 나의 돌봄을 받고 있다. 나와 함께 매일 온 힘을 다해 허그하고 매달리고 볼을 부비고 서로 얍얍얍 이상한 대련을 하고 도로시가 나에게 달려와 밥을 우적우적 떠먹여 주고 아내와의 대화를 차단하고 오직 자기 하고만 모든 이야기를 하라고 하고 책을 보다가 달려와서 웃긴 캐릭터에 대해 해석하고 의견을 나누고 닌자고, 티니핑, 우리의 지구, 포켓몬, 에그박사 등등에 대해 유니버스를 펼치며 아무 말이나 나누고 갑자기 짐볼을 발로 차서 패스하고 그림을 같이 그리고 싶다고 색연필을 가져오라고 하고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고 화장실에 같이 가자고 하고 내일 회사에 가지 말고 자기랑 놀자고 하고 어제 꿈을 꿨는데 내가 나왔다고 하고 커튼 뒤에 숨어서 나보고 찾으라고 하고 제주도에 또 놀러 가고 싶다고 하고 머리를 묶어 달라고 한다. 도로시의 눈, 뺨, 이마, 책 읽는 모습, 발바닥, 손등, 잔머리, 다리, 등, 배... 볼 때마다 멍해진다. 아내를 바라보듯 도로시를 바라보게 된다. 저토록 찬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존재와 나는 살고 있구나. 일상의 이런 상념은 물리적 음성과 뒤섞인다. 아빠 물, 아빠 보드게임, 아빠 오므라이스 잼잼 7권, 아빠 휴지, 아빠 잠깐만 일로 와, 아빠 나랑 저기 좀 가자, 아빠 내가 웃긴 이야기 해줄까, 아빠 우리 반에 이런 애가 있는데, 아빠 이거 볼래? 아빠 아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 보면 다리 근육이 뻐근하거나 하중이 버거울 때가 있다. 아내는 이런 분주함을 하루종일 지탱하느라 더 힘드니까. 성인 남성의 어리광은 적당함이 요구된다. 다시 도로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평일 낮 업무 및 출퇴근을 하며 혼자 오가는 시간 동안 도로시의 잔상이 침투한다. 나의 한계, 도로시의 한계, 둘의 견딜 수 없는 연결성, 필연성에 숨이 조금 거칠어진다. 쉽게 거론되는 경제적 물질적 부분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십 년 천 개의 글을 써도 한 뼘도 성장하지 않던 어느 인간은 자신에게서 나온 아이가 자신의 과거현재미래의 결핍에 영향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문제라고 생각하면 문제란다, 다들 어떻게든 살고 있단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같은 어디서 본 듯한 그럴듯한 무명인들이 떠드는 말들이 꽃가루와 고속도로 소음처럼 맴돌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 올리지만 소용없다. 나의 한계가 타고난 것인지 성장 과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학습된 것인지 오염된 것인지 원인을 골몰히 파헤쳐도 현재 상태의 결과는 같다. 어쩌면 영영 떨칠 길 없는 부족함이 도로시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이미 미치고 있을까 봐 앞으로도 그렇게 될까 봐 불안이 겹치고 차오르고 굳게 잠긴 문을 열 열쇠는 애초에 없다. 이런 나의 결핍들이 너를 누군가와 다르게 만들도록 구분하게 해주는 지점이 될까. 이게 드러나면 멀리서도 너를 발견할 수 있을까. 너와 나는 서로의 닮은 결핍을 확인하며 서로를 더 좋아하고 의지하고 더 오래 이야기하고 더 찾게 되고 더 보고 싶어 하고 더 같은 시간대의 같은 우주의 동료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인정하고 곁에 두게 될까. 언젠간 나의 결핍을 닮은 자신의 결핍을 원망하고 나에게서 등돌릴 수도 있을까. 스스로의 힘과 의지와 노력을 바꿀 수 없는 부분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도로시는 그때 내가 많이 미울까. 그때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결핍의 정체성은 또렷하지 않을 텐데. 그 파장은 우리가 견딜 만큼 스며들까. 너의 키가 자라는 만큼 관점이 성장하고 사고가 팽창하고 삶과 세상과 관계에서 더 많은 세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가까울까. 나는 근심의 고도를 낮출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서로가 적당히 비슷하게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너는 어떤 정신세계를 축조하며 자랄까. 나에게서 이어받은 좋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로 나에게서 이어받은 좋지 않은 것들을 뒤덮을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지금 나누고 있을까.
나는 나라서 도로시에게 나만큼의 선물을 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나의 한계이자 도로시의 한계이며 우리의 한계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사랑, 희망, 행복 같은 말들은 쉽고 예쁘지만 그만큼 쉽게 벗겨지고 찢어지는 포장지 같은 것. 차라리 나를 영영 온통 좋은 쪽으로 착각하며 바라볼 수 있는 렌즈가 장착된 안경을 씌워주고 싶다. 내가 너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렇게 여기듯 너는 너만의 렌즈로 나를 그렇게 한없이 좋은 쪽으로 보고 읽고 해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먼지와 틈과 어둠이 있다면 모조리 은폐하고 영영 우리는 우리만의 행성에서 특별한 공기 속에서 온기 속에서 우리만의 스노볼에서 그렇게 어울리고 싶다. 결핍 같은 복잡한 것을 인지할만한 지성은 내려두고. 차라리 끝나지 않는 착시 속에서. 우리만의 만찬을 즐기자. 도로시, 아빠는 지금도 니가 보고 싶어. 새로운 과자를 준비했으니 이따 보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