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평생 토마토를 키웠다. 대규모로 지어진 비닐하우스에서 수십년 동안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아빠 하우스 간다" 는 "아빠 일하러 간다" 와 같은 뜻이었다. 지금은 은퇴하셨다. 어릴 적엔 다른 작물을 키우기도 했다. 우리 동네의 가구 대부분은 비슷한 형태로 농업에 종사했다. 다양한 농자재와 수확한 토마토를 담은 수많은 박스등을 실어 날라야 해서 1톤 트럭이나 다인승 승합차는 다들 한두 대씩 있었다. 방울토마토를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대규모로 키운 동네라서 논산 딸기와 함께 종종 TV에 소개되기도 했다. 독립을 하며 대형 마트에서 방울토마토가 소포장으로 파는 것을 보고 자주 놀랐었다. 사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렇게 적은 양을 이렇게 비싸게 팔다니. 여러 식당에서 먹게 된 방울토마토의 맛은 형편없었다. 아빠는 자신이 키운 방울토마토가 협동조합에서도 우수한 품질을 인정 받는다는 점에 자부심이 있었다. 서열을 나누는 기준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늘 최상위였다고 하셨다. 아빠는 청년일 때부터 토마토를 키우며 장마철에 농기계를 수리하다가 오른쪽 손이 심하게 다치기도 했고 한겨울 같이 일하실 분들을 태우고 교통사고가 크게 나기도 했으며 5톤 트럭이 높은 언덕길에서 굴렀는데 멀쩡하게 걸어나오시기도 했다. 내가 군대 첫휴가 나와서 일손을 돕다가 (내가) 목숨을 잃을 뻔도 했었고 거센 바람에 하우스 비닐이 상당 부분 날아가서 수습하기도 했고 거대한 폭우에 수해를 입기도 했으며 언젠가부터는 한겨울 작물이 얼지 않도록 땅 속에 전기선을 깔아서 온도를 유지하기도 하고 휴대폰앱으로 조도, 습도 등의 하우스 내부 환경을 컨트롤 및 관리하기도 했다. 한때 키우던 다른 작물 중엔 쌀도 있었다. 친척 및 이웃들과 콤바인으로 벼를 거두고 마른 논에 불을 붙여 정리하던 기억이 있다. 다른 사람 경험과 인생처럼 쓰고 있지만 아빠와 농사는 내가 직접 겪은 경험과 인생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청년 시절과 표면적으로 많이 다른 시간을 보냈지만 그가 키운 방울토마토가 있었기에 대학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이 글은 여름방학을 맞아 같이 일기를 쓰고 싶다는 도로시의 요청에 의해 쓰여졌다. 우리는 오늘 국립농업박물관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