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문

by 백승권

감기에 걸리고 나니

내가 혹시 요즘 한동안 겪었던 정신적 혼란이

감기 바이러스에 장악당한 근육과 신경의

뒤틀림 때문이었나 싶었어요.


자주 가는 의사 선생님에게 다시 가서

증상을 말하고 길고 빛나는 금속 막대기를 밀어 넣어

목구멍 사진을 찍고 약을 지었어요.


아픈 건 의심이 아닌 공식 진단이 되었죠.

열감이 얼굴에 아른거리고

목의 붓기와 이물감은 내내 거슬리고

숨은 뜨겁게 윗입술 위에서 나부끼고

무엇보다 힘이 없어요.

힘이 없네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고

일에 필요한 실행을 위한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이

멍한 채로

멍하게 멍한 채로

멍한 멍멍이 같이

멍청해 보이는 부끄러움마저 잊은 멍돌이 같이

멍한 상태로 해야 할 것들을 해야 했습니다.


최악을 너무 오랫동안 생각했더니

최악은 다행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최악을 상상하며 소비한 시간이 아까웠어요.


그리고 남겨진 상황 속에서 조각을 몇 개 주워

긍정의 입김을 힘껏 불어넣어 풍선처럼 부풀려놓았죠.

착시라도 일으키고 착각이라도 해서

스스로 최면이라도 들게 해서

괜찮은 척 버텨야 하니까.

모든 걸 최악으로 받아들이면

나도 최악의 일부가 되어 나도

증오 혐오 포기 원망해야 하니까.


나보다 힘든 사람이 어디든 있겠지

이런 공상이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보스를 부수고 미션을 클리어를 하지 않아도 되니

이 게임에서 로그아웃. 탈퇴.

회원정보 삭제하고 싶어요.


내 방식대로 내 일을 사랑하고

함께 가는 사람들과 존중을 나누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취를 원해요.

환상이 아니라 그렇게 했을 때

늘 결과는 모두의 예상과 기존의 한계를

넘어섰으니까.


모든 배움과 깨달음의 전제가

장대한 고통과 절멸의 슬픔일 필요는 없잖아요.

웃음과 기쁨 속에서 진짜가 있으니까

과정 속에서 진짜를 누리고

결과와 함께 진짜를 만끽하고 싶어요.


하지만 진짜가 떠나면

진짜는 이룰 수 없죠.

진짜는 불가능해져요.


불가능한 세계에서 나는

먼저 떠난 자들을 떠올리며

마지막 인사하는 법을 떠올려요.


지옥에서 마지막 문을 닫고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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