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앙 젤레르 감독. 더 파더
난 이 집에서 떠날 생각 없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어요
언제까지 여기 계시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실 거죠?
엄마 보고 싶어
여기서 나갈래
누가 날 좀 데려가 줘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인간과 인간을 무너뜨리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없어요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기억하지 않았을 텐데
죄의식도 없었을 텐데
인사하지 않았을 텐데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슬퍼하지 않았을 텐데
죽더라도 몰랐을 텐데
인간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은 인간이 무너지는 모든 과정을
인간의 가장 가까이에서 모조리 감당하며
사랑하는 인간의 길고 느린 죽음과 기억의 소실과
그로 인한 슬픔과 고통과 오해와 갈등과 분열을
같이 겪어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자각할 때부터
일정한 책임감을 같이 지녀요
저 사랑의 대상을 내가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든 우리를 지키는 것이든
너를 지키는 것이든 이미 가진 힘과 새로운 힘을 더해
저 사랑의 대상의 현재와 미래를
지켜줘야 한다고 여겨요 그리고 같이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지켜낼 수 있는 힘마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기억이 무너져서 사람과 사건의 순서와 존재 여부를
제대로 모르면 그때그때 알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덧 깨달아요. 사라진 기억이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을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는 걸 의미해요
외모는 다르지 않겠지만
기억과 표현이 다른 것만으로도
그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관계는 같은 기억의 공유를 통해 존속되니까
기억의 수명은 곧 관계의 수명과 같겠죠
육체가 먼저 사라지면 기억은 좀 더 오래 살아남지만
기억이 먼저 사라지면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내가 기억하는 것들을 모르게 됩니다
그의 궁금증을 더 이상 내가 해결해 줄 수 없어요
잠시 잊은 게 아니라 완전히 지워져서
경험을 안 한 것과 마찬가지 상태니까
시계의 위치를 자꾸 잃어버리듯
시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지나며 타인의 탓을 합니다
너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내 물건을 어디다가 숨긴 거야?
너는 내가 우스워? 내가 어린애야?
그 사람은 점점 이전에 몰랐고 앞으로도 만나지 않을
타인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걸 지켜봐야 해요.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이 무너지고
관계가 붕괴되고 대화가 내려앉는
재앙의 더미 속에서 같이 허물어져야 해요
타인의 얼굴과 그들과 나눈 대화와
시간의 순서가 모조리 뒤섞이는
그 사람의 혼돈과 똑같은 풍경을
보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걸 이해하려고 내내 애쓰며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알려주고 퇴화를
늦추려고 갖은 애를 써가면서도
인정해야 해요. 더 이상 어떤 조치도
소용없다는 것을. 다시 쌓아 올리려 해도
예전의 우리집은 다시는
우리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같이 길을 잃는 것 같아도
서로의 잃은 길이 완전히 다르고
같이 고통받는다고 해도
고통받는 이유가 완전히 달라서
쉴 새 없는 무력감 속에서
그 사람과 함께 나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자신의 사랑이 시험에 들었다고 여기게 돼요
최선을 다했다고 여겨도 무력감이 줄지 않고
모든 방도를 다 동원해도 나아지지 않아요
이미 죽은 자의 Dead와 Dad가 같은 의미로 들립니다
기억 속에 죽은 자는 내내 살아있었으니까
죽어가는 자신과 죽은 그의
비슷해지는 지위를 실감하게 돼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과 인간의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은 그런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하죠
인간은 인간을 기어이 사랑하고
인간은 인간의 죽음 곁에서 같이 죽어가면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작정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어떤 고통과 슬픔은 저 멀리서 이미 기다리고 있고
우리는 그걸 애써 외면하며 천천히 그곳으로 정확하게
걸어가고 있어요. 그러다 결국 먼저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나약해서 사랑하게 되는 건지
사랑해서 나약해지는 건지
순서를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걸 몰라서
시작되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