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우정에 대하여

사직의 서

by 백승권

스스로를 불행한 인간으로 자리 잡게 한 후 자기 안의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마치 그렇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건을 겪은 후 회복의 시도, 복기를 통한 분노의 분출, 자제의 과정을 겪다 보면 결국 알게 된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학습은 소름 끼친다. 비극을 익숙하게 만드니까. 관점을 바꾸라는 말도 우습게 들릴지 모른다. 해석을 달리해 비극을 희극으로 보려 하다니. 초라하다. 난 영웅이 아니니 애써 희망의 메시지를 몸소 실천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유머는 중요하다. '긍정적 마인드를 갖자.', '위기는 기회다.' 같은 거지발싸개 같은 말들 역시 슬프지만 조금 필요하다. 그런 말들로 당장은 기운을 차려야 상황의 근원, 악당과 악마를 파괴하고 뭔가 다른 걸 해야 한다는 의지를 충전할 수 있다.


자기 객관화가 이럴 때 유용한 점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타인의 관점에서 기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사건을 당한 후 몇 시간 동안은 울렁거리는 뇌를 보호해야 했다. '이게 대체 뭐지?'와 '아 씨발 진짜 이건 뭐야?'와 '별일 다 있네.'의 공존. 궁금해하는 지인들에게 설명할 때에도 감정의 동요를 겪으면 곤란하다. 이럴 때 위로의 대상이 된다는 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불안을 겪은 눈빛은 쉽게 감출 수 없겠지만 초연하고 의연하게 당시를 요약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인들의 첫 반응은 공황이었다. 충격적인 일을 겪은 얼굴들을 봐야 했다. 표정엔 이런 일 처음, 이런 일 생길 줄 전혀 몰랐음, 체념과 공허함도 묻어 나왔다. 감정의 공유 후, 그들은 현명한 컨설턴트가 되어주었다. 준비할 것들과 챙겨야 할 것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주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의 간극은 고요했다. 밀도가 높은 공기로 채워져 있었고 보이지 않는 압력을 비교적 동일하고 느꼈으며 그동안의 유대들이 스멀스멀 온기로 드러나고 있었다. 말은 끊이지 않았지만 어느 하나 가벼이 넘길 말 한 목소리도 없었다. 이런 사람들과 일했다. 그동안 그들에게 "우리는 겨우 몇 년짜리 관계가 될 거야."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었다. "안 보게 되는 날이 오면 영영 안 보게 될 거"라고. 기억이 누적된 감정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날이 정해지다니, 먹먹하다. 내가 그날의 빈 의자가 되다니, 이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한부 우정이었다.


개인의 미래와 업적인 성취, 금전적 대비, 챙겨야 할 서류들 이런 거 다 떠나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늘 면과 선이 분명한 관계를 지향한다 여겨졌고 스스로도 그걸 의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모든 건 내 맘이 아니다. 끝내 우리들은 헤어진다. 가장 솔직했던 이들과 솔직할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간이 폐쇄되고 동선이 분리되며 입장이 달라진 후 우리는 서로의 다른 방향을 막을 수 없다. 가장 연약한 그늘과 구부린 등으로 먹이를 찾아 발길을 돌려야 한다. 안다, 이제 두 번의 협업은 없다는 걸.


남김없이 썼고 후회 없이 주장했으며 모든 결과를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수권의 책, 수천 장의 카피와 수백 편의 글, 수천 장의 사진, 수백 개의 광고를 쓰고 그리고 찍고 만들었다. 느린 컴퓨터와 종이와 펜이라는 초라한 사물들로 이룬 성과 치고는, 참 대단했다. 그들이 있어 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우리의 일이란, 개인의 한계 안에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각자의 생각은 목소리의 높낮이만큼 달랐지만 기꺼이 한 곳으로 모아 덧붙이고 다듬어 ‘우리'의 성취로 이끌어냈다.


단 몇 초의 진지함도 허용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모자란 농담들, 가차 없는 비난과 폭주하는 손가락질들, 폐가 아프도록 웃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맞장구를 치며 먼지뿐인 공간을 온기로 가득 채웠던 시간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이게 전부였다. 이게 전부여서 다른 '일'들이 가능했다. 일은 일이고 우리는 커피와 담배, 농담이 더 중요했다. 그게 일을 가능하게 했고 더 많은 커피와 담배연기, 농담들을 생산하게 했다. 여기서는 이제 끝이다. 막을 내린다. 관계도 대화도 커피도 웃음도 끝.


모든 천국과 지옥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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