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감독. 페니키안 스킴
내가 몇 번이나 더 죽을 수 있을까?
난 양심이 없어
종교는 억압받는 자의 한숨이야
고통에 대한 저항이지
모두가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살 필요는 없어요
어떤 이는 소박함 속에서 삶을 꽃피우고
어떤 이는 화려한 축제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죠
이건 책망이 아니에요
딱딱한 껍질을 가진 곤충은 포식자를 겁내지 않아
특정 영화를 본 후 해외 유력 매체들의 리뷰를 뒤져본 적은 처음이다. 쉽게 뭐라고 해야 하지. 세상에서 유일한 디자인을 지닌 케이크의 맛이 익숙하지 않을 때, 그런데 워낙 시력을 앗아갈 정도로 압도적인 황홀함을 지닌 미감을 지녀서 이 맛을 저평가하는 순간 아...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을 때,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영어권 강대국에 영향력이 높은 매체에 실린 리뷰가 궁금했다. 나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저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서. 다들 비슷한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 역시 익숙한 단 하나의 설정만 남기기로 했다.
아빠와 딸
아빠는 유명한 범죄자다. 부인 셋이 죽었고 휘하에 자식은 9명, 그중 한 명이 딸이고 수녀다. 아빠는 역할의 일부지만 그는 거의 모든 컷에 딸과 함께 배치된다. 유일한 상속자로 딸을 지목하고 딸은 갑자기 찾아온 인간이 이상한 제안을 해서 얼떨떨하지만 모험이 궁금해 따라나선다. 명색이 주님의 자녀라서 재물욕심은 딱히 없다. 정부도 노리고 암살자도 노리고 아빠를 죽이고 싶은 일당이 많고 아빠를 태운 비행기는 늘 추락한다. 이번엔 딸도 같이 타고 있어 같이 떨어지고 총도 맞지만 둘 다 살아난다. 영화니까.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리얼리즘은 미술이다. 드라마와 감정선이 강한 스토리가 아니라 컬러와 선, 레이어와 배치, 구도와 미장센, 사물과 사람들이 모두 미술과 조형의 일부가 된다. 인물들도 피겨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고 대사도 문장 끝을 짧게 끊으며 만화처럼 이야기한다. 어이없어서 웃겼다. 특히 베네딕트 컴배베치의 수염과 이마, 진지한 못생김과 난장판 같은 격투가 웃겼다.
아빠와 딸은 종이탈을 쓴 연극 무대 위 인형 같다. 아빠는 어려운 대사를 척척 카리스마 넘치는 진하고 그윽한 외모로 시종일관 발사하고 딸은 무표정한 리액션과 아무렇지 않은 과장으로 받아친다. 냉소와 어리숙함이 오가고 시간이 쌓여서 이자처럼 정이 붙는다. 결국 아빠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포기하고 딸은 평범한 삶 속에서 주님 대신 아빠와 식당 운영을 선택한다. 인생은 짧으니까 둘에게 인내를 담보로 하는 부귀영화는 부질없어 보인다. 원장 수녀마저 수녀(딸)를 기꺼이 보내준다. 모두가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니 가난한 십자가 앞이 아닌 돈 많은 아빠를 선택해야 한다고. 대신 후원금은 잘 챙겨달라고.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만 누구도 잘 놀라지 않는다. 암살범이 눈앞에서 자살해도 아랑곳없다.
범죄자가 뉘우치지 않는다. 그저 딸을 선택할 뿐. 둘은 8명의 아이와 함께 지내며 평화로운 결말을 맞는다. 죽은 세명의 부인은... 흑백화면의 사후세계에서 흥미롭게 등장하고 그중 한 명이 샬롯 갱스부르였다는 걸 나중에 알고 너무 놀라웠다. 행운과 천운, 기적이 시종일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주종목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같은 화면 속에서 벌어진다. 인과관계를 비웃듯이. 인간은 비극과 기적을 이해하고 싶어서 관계성을 만든 것은 아닐까. 신의 존재를 믿는 거야 말로 가장 말이 안 되는 건데. 사는 내내 악당이더라도 신을 떠나도 인생은 아무렇지 않게 또 아무렇게나 돌아간다. 신과 재물, 엄마 어느 것도 삶의 필수요소가 아니다. 처음부터 없을 수 있고 언제든 잃을 수 있으며 아무 상관없다. 당장 죽더라도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