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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 없는 세상. 메모리

미셸 프랑코 감독. 제시카 차스테인 주연. 메모리

by 백승권

타인의 일상이 어둡고 불행한 장면을 보면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 부풀어 오른다

여기서 불행의 묘사는 매우 디테일해야 한다

영화가 뒷면에 무엇을 감추고 있든

결국 영화의 역할은 그런 거겠지


감상 초반에 여기까지 메모한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오만과 교만은 짓눌러 으깨어진다

타인의 고통을 계량화하며 자신과 비교하려는 행위는

붉어진 뺨을 떼어다 폐기시킬 정도로 부끄러워진다


어떤 불행은 비견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타인의 불행이 존중받아야 하지만

모든 이란 표현조차 감상자의 이해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한계는

온전한 이해를 방해한다


실비아의 모든 것을 강하게 압박하는

고통의 불편이 극에 달할 때 방조하고 회피하며

거부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암묵적 가해자들의

편에 쉽게 서려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연출과 편집의 장치로 고통의 진실의 등장을

지연시키고 낯설게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차라리 평생에 걸친 거대한 오해이길 바라기도 했다

그리고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용서하길 염원했다


실비아의 삶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완전연소, 소진된 상태처럼 보였다

홀로 사춘기 딸을 키우며 성인 복지 시설에서 일하는

실비아를 엄마와 언니는 걱정했지만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실비아에겐 과거가 있었고 엄마와 언니는

부정하고 있었다. 실비아에게 거기서 얽힌 건

풀고 나오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실비아는 바뀌지 않았다 실비아가 희망을 발견한 건

자신보다 더 망가져 보이는 사울을 마주한 이후다


실비아는 어릴 적 성폭력을 당해 늘 불안에 억눌렸고

사울은 인지저하증으로 돌봄 없이 일상이 불가능했다


둘은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주변의 걱정 속에서 지내야 했으며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한 감정마저 없애지는 못했다

강력한 사건이 없어도 언제든 더 무너질 수 있었다

실비아에게는 딸의 존재가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었고

사울은 동생의 헌신에 목숨을 크게 빚지고 있었지만

그만큼 개인의 행동반경이 좁아지는 요인이었다


처지는 다르지만 기댈 수 있는 서로가 있다고 해서

과거의 비극을 용서하거나

잃어가는 기억력이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나 정도 혼돈을 느끼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구나

정도의 안도, 이것만으로도 서로의 존재 이유는

강렬하고 충분했으며 대체 불가였다


둘은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지만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이 현재 일상의 구도를

조금 바꾸더라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삶에 의지가 생긴 적은 없었다

둘은 서로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놓아줄 수 없었다, 이조차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남은 생의 기억은 서로의 이미지로 채우고 싶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여

개인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과거로 돌아가

가해자를 죽인다고 해도

현재의 고통은 달라질 수 없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고통을 만들었고

과거를 지우면 현재도 사라진다

이게 허용된다면 둘의 만남은 삭제되어야 한다


실비아(제시카 차스테인)와 사울(피터 사스가드)은

서로 어쩔 줄 모르는 고통 앞에서 몸부림치며

서로를 끌어안으려 노력하지만 이마저도 어색하고

쉽지 않다. 트라우마가 끊임없이 뒤흔들며

감정의 집중을 훼손하려 한다


너무 위태로워 보인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줄 위에 서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서로에 대한 애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외부적 요인으로 힘없이 분리될 수 있겠지만

둘은 다시 서로의 온전한 기억이 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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