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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넷플릭스 시대에게 고함: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 감독. 소설가의 영화

by 백승권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의 어색한 만남과 대화의 장면은 홍상수 영화의 공기. 주제와 배우가 무엇이든 그의 모든 영화는 이 특성 안에 빨려 들어가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도망도 갈 수 없고 미쳐버릴 것 같은 민망함이 몸과 정신을 옥죄며 이야기 자체보다 인물이 인물을 대할 때의 태도와 분위기의 합이 영화 하나의 크기보다 큽니다. 일상을 도려내서 가져다 놓아요. 과거의 자기 영화 대사를 오려서 같은 배우에게 똑같이 부여해요. 질문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답변. 답변이 다시 질문이 되는 대화. 대화가 다시 반복되는 대화. 인물과 인물이 주고받으면서 다른 인물과 다른 인물이 다시 반복하는 대화. 아마 러닝타임이 8시간이라도 해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미량의 적막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그럼에도 아스라한 아름다움이 인물과 인물 간의 대화의 적나라한 어색함을 상쇄할 수는 없어요. 업계에서 이름을 알린 예술가들과 그들의 서먹서먹함, 찝찝한 과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자를 수 없는 애매모호한 상황. 뻔뻔함과 초라함을 무릅쓰고 작고 기이한 칭찬의 연속으로 이어가는 대화들. 오가는 술잔. 끊기는 대화. 의미 없는 말들. 궁금하지 않지만 묻는 질문들. 신물 나는 문학계와 동경하는 영화라는 세계. 소설가는 자기만의 세계가 담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고 우연과 용기로 캐스팅에 성공합니다. 참 착해, 참 예뻐. 참 좋아, 참 멋있어. 작은 감탄의 연속으로 끊어지지도 않는 관계들. 영화가 만약 '소설가의 영화'처럼 저리도 질척이고 어색하며 민망한 사전작업을 통해 가공되는 창작 영상물이라면 순수보다는 용감한 실험결과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대한 자본이 관여한다면 더럽고 억울한 일들은 더욱 넘치겠지. 하지만 작은 규모라고 그런 일들이 더 작을까 싶기도 하고, 다른 분야도 보통은 그러지 않으니까. 자기만의 온전한 결과물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고 전문가의 시간과 능력과 희생을 이용하고 그렇게 자기 세계가 만들어지고 상영을 하고 평가를 받고 기억과 이미지가 되고 나중엔 술자리 이야기가 되고 새로운 관계가 되거나 영원한 단절이 되기도 하고. 국제 영화제 수상이라면 국경을 넘은 지지와 공감을 획득했다는 건데 영화라는 장르가 이렇게 많은 감정과 관계와 이야기를 파생하고 또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다시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대한 영화에 대한 영화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딴딴따단 딴딴따단 결혼행진곡이 허밍으로 울려 퍼져요. 김민희의 어여쁘고 행복한 표정과 함께. 모든 갈등과 어색함을 뒤로한 채 영화는 고백과 편지가 됩니다. 영화가 그렇게 추앙받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모르겠어요. 진격의 넷플릭스 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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