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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는 삶

by 백승권

제 인생의 일부가 제가 쓴 글에 담긴다고 할 때

제가 쓴 글에 담기지 못한

나머지 제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기록되거나 기록으로 남지 않는

삶의 의미 따위를 따지는 게 아닌

기록되지 않는 삶의 정체와 운명에 대해 궁금해집니다


완전히 결론 내려지며 말끔하게 실행되는 것들은

시간과 무리 속에 흩어져 쉽게 사라져요

그런 것들은 굳이 개인의 기록에

자리를 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기장은 작고 밤은 짧으며 나는 졸리니까


등을 바깥으로 향하고 눈을 내부로만 둘 때

겨우 1인분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사라지겠구나 세상을 이야기하면 뭐 하나

무명의 물결로만 흔들리다가 증발하고 타버릴 텐데


세상을 뭐 하러 바꿔 내 안구의 컬러만 바꿔도

샤넬 괄사 같은 구름에서

도시 위로 핏물이 쏟아질 텐데

나 하나만 바꾸면 감각 관점 경험 감정만 바꾸어도

세상을 다루는 태도 속도 중력 온도가 바뀔 텐데


나를 감지하면

새로운 세상의 기원을 해석할 수 있어요

나는 애초 내 것 같은 게 전혀 아니었고

어차피 어딘가 흩어져있던 물질들이 덩어리를 이루고

전선 같은 것들이 연결되어 추상의 이미지를 그리며

기계 같은 것들이 서로 기능을 나누며

작동하고 있으니


렌탈도 구독도 독점도 소장도 아닌

아무도 관심 없는 고장의 형태와 비슷하겠지

이런 글들은 적당히 암호화된 자가 관찰 일지 같은 것

스스로 수리할 수 없고

더 나은 플랫폼과 융합될 수 없어요

최소한의 텍스트 압출 기능을 제외하고

아무 쓸모없는 것, 뇌와 손가락이 닳는다면

그마저도 멈추겠죠


그리하여 기록되지 않는 삶은 무엇인가요

여기서 그걸 적으면 기록되지 않는 삶이 아니니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기록되지 않는 삶을

존중하고 보존하려 합니다


개인의 기록되지 않는 삶으로 인해

기록되는 삶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뫼비우스적 상생 구조도 떠올려봅니다


기록되지 않는 삶으로 인해 이렇게

기록할 수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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